은 수정을 해서 e-book 으로 냈습니다.

연재 분량에서 세배 정도 늘렸는데도 아직 중편 정도네요.

홈에 있는 오래된 거짓말은 잠궈둡니다.



- 최은영-


====> 종이책에 관해서 첨언합니다.

e- book 분량에서 두배 정도가 늘었습니다.

건호와 현주가 결혼하기 전의 과정이 앞부분에 들어갔어요.
집안에 의해서 현주가 끌려가듯 결혼한 과정이 새로 들어간 이야기랍니다.

뒷부분은 전자책과 같이 결혼후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건호이야기가 들어갑니다.

e-book이 만추의 분위기라면
종이책은 한박눈 펑펑 내리는 날 같은 분위기입니다.
같은 이야기라도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을거예요.




**** 맛보기 *****



"아이구, 사장님."
강씨가 먼저 발견하고 수선스럽게 달려나갔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벌써 경비실 안으로 들어서며 만면에 사람 좋은 웃음을 지는 사장을 보며 근종 씨는 긴장하였다. 경비실에 사장이 무슨 볼일이 있는가 싶어 어쩐지 개운치 않은 기분이었다.

"그럼요. 어서 들어오세요, 밖이 춥습니다."

강원도 산간 지방의 해가 나지 않은 12월의 한낮은 몹시 추웠다. 뭐라도 내릴 양인지 하늘이 시커멓고 무겁게 가라앉은 것이 아침부터 무릎이며 허리가 뭉근이 쑤셔 대고 있었다.

"많이 춥지요?"

강씨는 자신이 보던 신문을 재빨리 숨기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었다.

"불 좀 쬐러 왔습니다. 허허."
"이 누추한 곳에…… 이쪽으로 오십시오."

강씨가 손바닥만 한 경비실에서 금방 자신이 앉았던 의자 쪽으로 사장을 안내했다. 불이 발갛게 붙은 석유 난로 위에는 노란색 주전자가 펄펄 김을 뿜고 있었다. 옥수수 냄새가 나는 것이 구수했다.

공장에는 엄연한 사장실이 있었다. 최적의 난방과 질 좋은 소파까지 갖춰 두었는데 누추한 경비실에 불 쬐러 왔다는 것은 분명 진실이 아닐 것이다.

"여긴 따순 물 밖에 없는데……."

뭐라도 대접을 하긴 해야 하는데 옹색한 경비실 안에는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근종 씨는 두 개 밖에 없는 하얀색 플라스틱 컵에 난로에서 끓고 있는 옥수수 물을 따랐다.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이 맛은 그래도 추위를 녹일 만큼은 따뜻할 것 같았다. 사장의 입맛엔 민숭하겠지만 대접할 게 이것 밖에 없으니 민망할 노릇이었다.

"눈이 오려나? 내 잠시 한 바퀴 돌아보고 올 테요."

엉덩이를 뒤로 빼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강씨는 얕은꾀를 부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털장갑을 찾아 손에 쥐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사장도 강씨를 따라 창문 너머로 고개를 빼고 짐짓 하늘을 올려다보는 체하며 강씨가 나가기를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였다.  

"아주 구수하네요."
"네에, 집에서 옥수수를 볶아 왔습니다."
"어쩐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근종 씨는 난감했다.

"흠흠……. 집에 이 대리 하나만 남았지요?"
"그렇지요."
"이제 해 바뀌면 서른인데 이 대리도 어서 결혼해야지요?"
"아, 예에. 그래야지요."

아들 얘기를 하러 여기까지 왔던가? 근종 씨는 두텁게 굳은살이 박힌 손으로 괜한 주전자 뚜껑만 열었다 닫았다 했다.

"혹…… 누구 사귀는 사람이라도 있답니까?"
"글쎄, 별다른 말은 없는데…… 갸가 말을 잘 안 해 놔서……."

뒤통수를 긁적이며 근종 씨는 사장의 속내를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신통찮은 근종 씨 대답에 이상하게도 사장은 입이 쭈욱 찢어져 실없이 웃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 대리가 입이 무겁긴 하지요. 그러면 제가 좋은 아가씨 좀 소개 해 줘도 되겠습니까?"

"아이구 별말씀을, 짝이야 저절로 생기겠지요. 감히 사장님이 소개시켜 주는 짝을 우리 형편에…… 가당치도 않습니다."

손까지 저어 가며 근종 씨는 펄쩍 뛰듯 사양했다. 근종 씨 생각에는 어지간히 비슷하게 사는 쪽에서 며느리를 얻어 와야지 괜히 사장의 눈높이에 맞는 턱없이 높은 쪽에서 얻어 오면 이래저래 골치가 아플 것 같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가 제격이다.

"저는 이 대리 같은 아들 하나 있으면 딱 좋겠습니다. 남 같지 않아서 제가 참한 아가씨 하나 소개해 주고 싶네요. 저는 이 형이 부럽습니다."
"아이구, 무슨 말씀을……."

농담조의 말이지만 전혀 과장은 아닌 듯 사장의 눈빛은 진솔했다. 근종 씨는 사장이 예까지 찾아와 이런 말을 꺼내는 이상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온 것 같아 점점 더 마음이 불편해졌다.

"지가 좋다고만 하면……."
"하하, 그럼 제가 알아서 해 보겠습니다."
"그래도 너무 좋은 집안은 안 될 텐데……, 아가 잘나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집 형편이 모자라서……."

근종 씨는 말끝을 흐리면서 결국 아까부터 뱅뱅 돌리던 말을 하고야 말았다. 비록 나이가 근종 씨보다 어리다 해도 이렇게 큰 공장을 운영하고 많은 직원들을 먹여 살리는 사장에게 큰 존경심을 가지고 큰맘을 먹고 한 시도였다.

"하이구, 걱정 마십시오. 이 대리만 한 사람이라면 싸 짊어지고서라도 데려가고 싶어 할 겁니다."

근종 씨는 어째 사장의 말 중에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꼭 생선가시 목에 걸린 것처럼 데려간다는 말이 산뜻하지가 않았다. 잠깐 할 말이 끊어져 맨송맨송 어색하게 주전자에 뽈뽈 거리는 김만 쳐다보았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에서 한 송이 두 송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허. 이런 낭패가……. 오늘은 이 대리가 운전해서 같이 내려왔는데 올라갈 생각을 하니 큰일이로세. 눈이 어두운데 길까지 이러니 어쩌나?"

사장은 근심 가득한 눈으로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눈송이를 쳐다보았다.  

"천상 건호가 함께 가야겠네요."

아쉬웠지만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토요일인데 집에 묵었다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자주 보는 걸요."
"그럼 이 대리는 제가 데리고 올라가겠습니다."

한껏 서운한 마음이 드는 근종 씨와는 반대로 뭐가 좋은지 해실해실 웃음 짓던 사장이 몸이 다 데워졌다며 일어섰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사람 좋게 인사를 건네고는 사장은 경비실을 나갔다. 사무실까지 꽤 기나 긴 길을 가로질러 가는 사장의 뒷모습을 보던 근종 씨는 착잡한 마음으로 한숨을 내리쉬었다. 막 출입문을 닫으려는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강씨가 퍼렇게 얼은 얼굴로 나타났다.

"왜서 들렸대?"
"그냥."

공장 주변을 돌아보러 간 게 아니라 어디 근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나 보다. 사장이 손바닥만 한 경비실 안으로 들어오니 한(寒) 대로 나가 있는 게 나을 정도로 불편했나 보다. 꽤 추웠는지 근종 씨 보다 먼저 안으로 뛰어든 강씨가 난로 옆에 바짝 다가가 얼은 몸을 녹였다. 근종 씨도 잠깐 사이 찬바람 맞은 몸을 데우기 위해 난로 근처로 갔다.

"내 보기엔 그냥이 아닌 것 같두만. 이 추운 날에 미쳤다고 정문까지 걸어왔다 가나?"

강씨의 어깨엔 벌써 눈이 묻어 있었다. 내리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됐는데 아무래도 폭설이 내릴 듯했다.

"건호 중신 좀 선다고 하시네."
"난 또 무슨 일인가 시껍했네."

근종 씨는 마음이 복잡했다. 몸이 녹자 괜히 책상 서랍을 열어 보기도 하고 장부도 펼쳤다 닫기도 했다.

"혹시 자기 딸내미가 아닐까?"

딴에는 곰곰이 생각한 강씨가 불쑥 말을 꺼내 놓았다.

"무슨? 그런 말 마라. 어데 감히?"
"아니다. 지난번에 박 기사가 그러는데 사장이 딸만 셋이라서 건호를 그리 이뻐한다고 하드라."
"설마?"
"뭐 건호야 똑똑하니깐 부잣집 메누리 얻으면 안 좋겠나?"

강씨에겐 어림없는 소리라고 딱 잘라 말했지만 근종 씨는 자꾸만 서운한 감이 들었다. 맛난 저녁을 먹이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오랜만에 집에서 끓인 청국장을 먹일까 했는데 사장이 건호를 마치 자기 식구라도 되는 것처럼 달랑 데리고 올라간다니 아들을 뺏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