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맨드라미, 채송화, 금잔화 등등. 부지런한 엄마와 할머니가 한쪽에 정성 들여 키워놓은 상추도 토마토도 볕 잘 드는 남쪽을 향해 줄을 맞춰 서 있다. 활짝 열린 툇마루에서 꼬박꼬박 졸음에 겨워 선잠을 자는 인경의 옆에서 할머니가 부채를 들고 달큰한 아이 냄새에 달려드는 모기며 파리를 쫓아내고 있다.

조금 있으면 학교 가 있는 아이들이 돌아와 매미소리만 요란한 집 안을 웃음소리와 수다 소리와 피아노 소리로 가득 채울 것이다.

지난밤에 엄마와 할머니는 머리를 맞대고 오래도록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이 와 꾸벅꾸벅 졸린 눈을 억지로 뜨며 인경은 할머니와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귀를 세워보았지만, 오후에 동네 아이들과 구슬치기 놀이를 심하게 한 터라 버틸 재간이 없었다.

화장실을 새로 개축한 지 얼마 안 되었건만, 말소리 중에 언뜻언뜻 요강이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요강이라 힘주어 말하는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웃음기보다는 진지함이 들어 있어 인경도 웃음소리를 내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더운 날이라 코밑에 땀이 송송 돋은 엄마는 수돗가에 앉더니 힘을 주어 벅벅 요강을 씻기 시작했다. 인경은 마루에 발을 대롱거리며 앉아 엄마의 뒷모습을 보았다. 심심했다.

학교에 간 언니들은 언제나 집에 올까?
인경은 조물조물 발가락을 가만히 움직여보았다. 오전 내 얼마나 걸었는지 반질반질 윤이 나는 까만 에너멜 구두에 먼지가 앉아 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요강을 보더니 엄마는 다시 부산하게 움직여 부엌으로 들어가 쌀을 퍼 왔다. 쌀남박에 쌀 씻는 소리와 수돗물 소리가 명쾌하다.

인경은 구두를 벗고 엄마에게 들키지 않게 살금살금 언니의 방에 들어갔다. 인경의 키만큼 크고 검고 윤이 나는 피아노가 있는 방이다. 큰언니가 피아노를 배웠고 이제 작은 언니가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인경도 내년이면 피아노를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엄마가 말했다.

의자를 끌어내 겨우 올라가 앉았다.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피아노 치는 흉내를 내보았다. 언니들의 손놀림을 상상하며 움직이자 웃음이 킥킥 터져 나왔다.

가짜 피아노 놀이도 심심해져 하품이 나왔다.
바쁘게 돌아다닌 오전 시간의 끝인 만큼 피곤하기도 했고 심심하기도 했다. 하품을 몇 번 하더니 인경은 어느새 피아노에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다.

"인경아, 인경아."

가만히 흔들어 깨우는 손에 인경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내려다보는 엄마의 얼굴에 무거운 안개가 서린 듯하기도 하고 시선이 먼 곳을 향하는 것 같기도 해서, 인경은 조금 졸리지만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인경이 심부름 좀 할래?"
"응."
"가서 아빠 식사하러 잠깐 들어오시라고 해."

오전 내내 굳어 있던 엄마의 얼굴이 지친 미소를 언뜻 비쳤다.

"얼추 점심 장사 끝났을 테니까 얼른 가서 아빠 들어오시라고 그래. 갔다오면 엄마가 미제 아줌마한테 초콜릿 사줄게."

오전 내내 바쁘게 엄마를 따라다니며 시장통을 돌아다녔던지라 발이 조금 아팠지만 아빠한테 가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게다가 미제 아줌마가 가져온 특대 초콜릿까지 덤이라니 더욱 신난다.

"알았어."
"아빠한테는 그냥 집에 와서 점심 식사하시래요 하고 말해야 해."

엄마의 얼굴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인경에게 단단히 다짐이라도 받으려는 듯 마당까지 내려선 엄마가 몸을 낮춰 인경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냉큼 대답하는 인경이 미덥지 않은지 엄마는 긴치마를 부여잡고 인경의 앞에 키를 낮추어 앉았다. 이럴 때의 엄마 얼굴은 무섭다. 인경은 주눅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다.

"뭐라고 하라고?"
"아빠, 집에 와서 점심 드세요."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엄마가 살갑게 엉덩이를 통통 두드려주자 인경은 신이 난 듯 대문을 나섰다. 집에서 가게까지는 인경의 걸음으로 10분을 걸어야 한다. 앙감질로 깡충깡충 뛰어가면 어느새 가게 앞이다.

아빠의 가게는 춘천에서 가장 멋진 중국집이다. 늘 기름 냄새와 자장 냄새가 퍼지는 그곳을 인경은 좋아한다. 게다가 올해 초부터 새로 카운터에 앉은 미스 김 언니의 보조개가 너무나 신기해서 자주 놀러갔었다.

"안녕하세요."

2층으로 올라가 가게문을 열며 힘차게 인사를 하자 점심 장사를 끝내고 정리를 하던 오빠들이 인경을 향해 환하게 웃어준다.

"인경이 왔구나!"

똑같은 유니폼을 맞춰 입은 오빠들이 반갑게 맞아주자 인경은 으쓱해진다.

"인경이 자장면 줄까?"
"엄마가 아빠랑 집에 와서 점심 먹으래요."
"아빠 아직 일이 안 끝나셨는데, 부주방장 아저씨에게 말해서 조금 갖다줄게."

마음씨 좋은 인호 오빠가 다시 한 번 권하자 인경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의 자장면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다. 엄마가 해주는 밥도 맛나긴 하지만 그래도 아빠의 자장면만은 못 하다.

잠시 후 부주방장 아저씨가 인경이 먹을 수 있는 만큼의 자장면이 담긴 그릇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인경이 먹기 좋도록 긴 면도 가위로 잘라주고 석석 비벼서 내려놓자 인경도 기분 좋게 웃었다.
보기만 해도 입 안에 군침이 가득 돈다.

"어여 먹어라."
"네에. 그런데 미스 김 언니 어디 갔어요?"

오늘은 보조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아가야지.
인경은 예쁜 미스 김 언니를 볼 생각에 아직 한 가닥도 먹지 않고 급하게 물었다. 미스 김 언니는 정말 예쁘다. 웃을 때마다 한쪽 뺨에 쏘옥 들어가는 보조개도 예쁘지만 단정하게 유니폼을 입고 계산대에 앉아 긴 손가락으로 주판알을 퉁기는 모습은 더 예쁘다. 코티분 냄새는 향긋해 어느새 가슴팍에 포옥 달려가고 싶게 한다.

"아까 화장실 가는 것 같던데?"
"어디 탈이 났나?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오빠들끼리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인경은 자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자장면. 아빠가 만든 자장은 정말 특별했다.

"인경이 왔니?"

인경의 앞에 놓인 그릇 바닥이 보일 정도쯤에 아빠가 나타났다.
그 뒤로 어색하게 웃는 미스 김 언니도 나타났다. 오빠들 말대로 정말 배가 아픈지 눈자위가 빨그스름하다.

"아빠, 엄마가 점심은 집에 와서 먹으래요."
"그래. 아가씨 얼굴이 이게 뭐야? 헌 애가 됐네."

인경의 얼굴에 온통 묻었을 자장 범벅을 아빠는 티슈 한 장을 잡아 뽑아 꼼꼼히 닦아주신다. 아빠의 몸에서 달큰한 양파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더운 날이면 얇은 메리야스 한 장만 입고 앞치마를 질끈 맨 아빠는 커다란 도마 위에서 길고 긴 반죽을 탕탕 두드려대면서 면을 뽑아내신다. 굵고 건강한 팔뚝이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가늘어진 면은 나중에 인경의 손가락보다 더 가늘어진다. 그것이 신기해 매일매일 구경해도 질리지 않는다.

"인경이 다 먹었으면 들어가자."
"여기 물. 어서 물부터 마시고 가."

착한 미스 김 언니가 빠르게 따끈한 결명자 차를 내밀었다. 결명자 차는 조금 싫지만, 언니가 주는 거라서 인경은 이마를 찌푸리면서도 호호 불어 마셨다.

"아이, 예뻐라."
"인경이 얼른 서두르자."

미스 김 언니가 귀엽다는 듯 인경의 얼굴을 쓰다듬는데 아빠가 다시금 재촉하신다.

"네에."

아직 미스 김 언니한테 보조개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안 물어봤지만, 인경은 폴짝 뛰어내려 아빠의 손을 잡았다. 크고 두툼한 아빠의 손을 잡자 아빠의 냄새가 풍겨왔다.

"언니, 안녕."
"인경이 또 놀러와."

아빠 손을 잡고 가게문을 나가면서 보니 미스 김 언니의 눈자위가 조금 더 빨개졌다. 배가 더 아픈가보다. 할머니 손은 약손 해주면 얼른 나을 텐데…….

가게까지 올 때는 조금 멀다고 느꼈던 그 길이 힘이 센 아빠랑 갈 때는 힘들지 않았다.

집에 들어서자 햇살이 길게 들어온 마루에 보기에도 푸짐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엄마는 아빠가 자리에 앉자마자 아무 말도 않은 채 고슬고슬 지은 밥을 대접에 담아 내왔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풍기는 갖가지 산나물. 그리고 된장찌개. 금방 자장면을 먹었는데도 다시금 입에 침이 고였다.

아빠 역시도 엄마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은 채 수저를 들고 밥을 드시기 시작했다.
젓가락으로 푸짐하게 나물을 집어 대접에 담고 빨간 고추장을 넣어 석석 비벼서 한 입 가득 먹는 아빠의 모습은 저절로 입맛을 돌게 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 줄 알았다면 가게에서 짜장면을 먹지 않을 것을.

"아빠, 맛있어?"
"인경이 좀 먹을래?"

무릎걸음으로 아빠의 턱 밑까지 다가가자 아빠가 숟가락에 밥을 떠서 내밀었다. 막 입을 벌려 받아먹으려는데 부엌에 있던 엄마의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인경이 이리 나와라!"

요강을 닦던 엄마의 표정이 생각나 인경은 절로 주눅이 들었다.
어느새 아빠의 대접에 담겼던 밥이 반으로 줄었다.
다시 또 반으로 줄었다.

"밥이 더 없나?"

아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마는 새로운 대접에 밥을 가져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밥은 정말 맛있어 보였다.

"인경이도 아빠랑 같이 먹자."
"인경이는 조금 있다 나랑 먹을 거예요."

바람 소리가 날 것 같은 엄마의 목소리.
고추장에 비빈 밥이 조금은 매울 것 같았지만 한 입만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지라 엄마의 목소리는 야속하기만 했다.

"엄마, 나도 한 입만 먹으면 안 돼?"

인경이 큰 눈을 꿈뻑이며 물었지만 엄마는 신경질적인 예리한 눈으로 쳐다본다.
엄마의 눈빛이 무서워 인경은 얌전히 아빠의 밥그릇만 쳐다보았다. 고개를 수그리고 서운한 눈물을 글썽였다.

"시원한 물 좀 줘."

아빠가 엄마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하자 엄마가 종종걸음으로 부엌에 들어갔다.

"아 해봐."

아빠가 엄마가 사라진 부엌을 보며 인경에게 속삭였다.

"아."

조그마한 입을 딱 벌린 인경은 빨갛게 비빈 밥을 한 수저 받아먹었다.

"맵지?"

아빠가 살갑게 미소를 짓자 인경은 입 안 가득 퍼지는 매콤한 맛에 인상을 찌푸렸다. 부엌에서 막 나오던 엄마에게서 아빠가 물 대접을 받아 들어 인경에게 내밀었다.

"어여, 물 좀 마셔라."

꼴깍꼴깍.
인경은 입 안 가득 든 밥을 얼른 씹어삼키고는 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인경이 밥 먹였어요? 엄마가 아빠 밥 먹지 말라고 했지?"

미처 물이 넘어가기도 전에 회초리 같은 목소리로 엄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앵."

여섯 살 인경은 입 안이 매워서, 엄마의 매서운 눈초리가 무서워서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얘가 뭘 잘 했다고 울어? 그치지 못해?"

인경의 울음소리가 더 커지자 아직 밥이 남아 있던 아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왜 애는 잡고 그래?"
"얘가 버르장머리 없이. 그치지 못해?"
"우이씨, 집구석 하고는."

짜증이 왈칵 치민 얼굴로 아빠가 밥상을 밀치고 일어섰다.

"마저 드셔야죠?"

인경을 야단치던 엄마가 급하게 아빠를 붙잡았으나 아빠는 벌써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아이구 속상해. 이게 어떤 밥인데 너 때문에 다 망쳤잖아, 이것아."

엄마가 인경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엄마의 눈엔 시장통을 돌아다닐 때 흘리던 땀방울 같은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우앙."

인경의 울음소리는 담을 넘어갈 정도로 커졌다.

이듬해 봄에 미스 김 언니는 요강 밥을 남긴 아빠의 첫 번째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낳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 하던 엄마를 비웃듯 7년 만에 아빠는 아들을 얻었다.

할머니는 큰 미역을 사 갖고 오더니 간단하게 짐을 꾸리셨다.
안방에서 등을 돌리고 누워 있는 엄마에게 할머니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바람피운 사내에겐 요강 밥을 먹이면 효험이 있다더니 것도 소용이 없구나 하면서 한숨을 내쉬고는 짐을 들고 나가버리셨다.

다시 그 집에 아빠가 오는 일은 없어졌다.
집 안에서는 웃음소리도 점차 사라졌고 인경이 피아노를 배워 언니들에게 물려받기도 전에 피아노는 팔려 나갔다. 마당 한가득 피었던 꽃들도 점차 말라죽었고 피아노가 팔려나간 그 해에 집도 팔렸다.


그리고 인경은 더 이상 짜장면을 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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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거창하지만.....  인경이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