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지난밤 과한 숙취로 흐릿한 시야로 투명한 물빛 햇살이 찌를 듯 부딪혀왔다.
무방비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던 인경은 잠시 어지럼증에 휘청거렸다.

이른 아침 후경이 비행기를 타고 떠나버린 하늘은 깨끗하게 맑았다.
인경은 지금쯤 후경이 어느 만큼 갔을까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손으로 창을 만들어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손에 감긴 붕대가 햇빛에 비쳐 눈이 시리도록 슬프다.
그러나 인경은 개의치 않고 시선을 들어 먼 하늘을 서성거렸다.

“그렇게 좋아?”
“응.”

지난밤 큰언니 집에서 자리한 송별회에서 인경이 후경에게 물었었다. 초저녁부터 시작한 네 자매의 송별식에서 술로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후경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쫌만 서운해 주면 안돼?”
“안돼. 아니 싫어.”

인경의 물음에 후경의 야박하리만치 매몰찬 대답이다.
뜬금없이 유학을 가겠다고 선포하던 그날처럼 후경의 대답은 어쩐지 십년 묵은 체증을 덜어낸 듯 후련한 기색이었다. 마치 그동안 인경 때문에 오랜 꿈을 미뤄왔다는 듯 눈에 보이지 않는 어투 속에는 인경에 대한 원망의 무게도 살짝 묻어 있는 듯해서 인경은 이마를 찌푸렸다.

“으유, 얄미워.”

입술이 저절로 삐죽거리며 이죽거렸다.

“아이구 귀여운 것.”

후경이 엉덩이 걸음으로 옆으로 다가오더니 마치 아이들에게 장난이라도 치듯 인경의 엉덩이를 툭툭 건드리며 낄낄거렸다.

“잘 살아, 이것아. 큰언니처럼 살지 말고, 둘째 언니처럼 살지도 말고, 나처럼 살지도 말고.”

후경이 손을 뻗어 인경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방금까지 장난스럽던 말투가 갑자기 진중해졌다.

“너 맘 대로 살아. 누구한테도 발목 잡히지 말고 말이야.”
“갑자기 뭔 소리야?”

인경이 갑자기 무거워진 후경의 말에 괜히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 홀짝 거렸다.

“널 -- 가망 없는 이 나라에 혼자 두고 가는 게 서운 하지만, 그걸 보이는 순간 발길이 안 떨어 질까봐 안 서운해 할꺼야.”

마음 속 깊은 곳에 꽁꽁 숨겨놓은 마음을 어렵게 꺼내놓은 듯 했지만 후경은 아주 개운한 표정으로 한국을 떠났다.
오래 묵은 먼지를 탈탈 털어낸 듯 홀가분한 어깨와 상큼한 향이 풍기는 치약으로 칫솔질을 막 끝낸 것 같은 표정으로 이른 아침 혼자 공항으로 나갔다.

시큰하고 괜히 코끝이 아려와 인경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햇빛에 취한 양 인경은 비척이며 걸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오일 만에 처음으로 학교에 나갔다. 며칠을 정신없이 쫓아다니느라 입학식도 하지 못했고, 첫 수업도 그 외 모든 것을 놓쳐 버렸다.

과 사무실에 들려 수업 시간과 강의실을 알아내어 강의실을 찾아가자 낯선 타인들이 개미무덤처럼 옹글옹글 모여 있다.
오리엔테이션을 함께 했다고 해도 모두가 낯선 얼굴 뿐이다.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에 길게 엎드려 누웠다.
봄 햇살이 길게 인경을 위로를 하듯 창문 안으로 들어와 인경의 머리까지 와 닿았다.
인경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도 좋았다. 그냥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거지…….
삼삼오오 뭉쳐서 조잘거리는 수다 소리가 물속으로 잠긴 웅웅 거리며 멀어졌다.

“조인경?”

머리맡에서 딱딱한 어투의 목소리가 마치 고드름이 녹아 떨어지 듯 뚝 떨어져 내렸다.
나른하게 늘어져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눈을 느리게 깜빡깜빡 거린 후 고개를 들어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인경을 미간을 곤두 세우고 내려다보고 있다. 그 등 뒤로는 가방을 챙겨 일어나는 학생들이 언뜻언뜻 보인다.

“조인경 맞지?”

마치 범죄자를 취조하려고 온 형사인 냥 딱딱한 표정이다.

“맞아, 조 인경.”

옆 자리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대신 대답을 했다.

방금 전까지 인경처럼 책상에 나른하게 누워있던 긴 몸이 느리게 천천히 일어났다.
봄 햇살 아래 바랜 듯한 까만 트렌치 코트 차림의 그 녀석, 김 식 이었다.

“벌써 수업 끝났냐? ”

두 팔을 쭈욱 펴더니 늘어지게 길게 하품을 한다. 주변 모든 것에 무관심한 듯 나른하고 무심한 음성이다.

잠깐 눈을 감았다 생각했는데, 벌써 수업이 끝났나보다. 인경은 낭패감보다 자신의 옆에서 나란히 엎드려 잠을 자버린 김식의 어이없는 행동에 어처구니 없었다.

“오늘은 아웃사이더 노릇 할 생각 마. 저녁 7시 학생회관에서 신입생 환영회야.”

“누구? 우리가 아웃사이더?”

김식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대꾸했다.
꽤 오랫동안 이런 대꾸에 익숙해진 듯 인경의 이름을 불렀던 남자가 지긋지긋한 표정을 했다.

“김 식, 에지간히 해둬. 저녁 7시. 학생회관. 조인경도 꼭 참석해. 선배들이 인원 체크 한다고 했어.”
“씨발이... 무슨 군대도 아니고 인원 점검이야. 여기가 고띵인줄 아나?”

넌더리난다는 듯 돌아서가는 남자의 뒤통수에 대고 김식이 투덜거렸다.

“너……. 잘 자더라.”

김 식은 인경을 돌아보며 개운하게 웃었다.

“하긴, 저 교수 목소리가 수면제 저리가라 할 만큼 지루하긴 하더라.”

시답잖은 너스레를 떠는 김식의 모습이 지나치게 자연스럽다.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온 것 처럼…….
헤헤 거리고 웃던 김식의 시선이 잠깐 인경의 손에 와 닿았다. 꼼꼼하게 붕대를 감은 손을 내려다보더니 잠깐 동안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붕대에 대해서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인경은 지나치게 피곤했다.
대학생활의 첫 수업 시간을 정신없이 자느라 놓쳐 버릴 만큼.

“다시 보게 될 줄 알았지. 벌써 동침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

의기양양하게 개선장군처럼 김식이 웃었다.

“머리 아파.”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를 또 만나버린 인경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시시한 잡담 따위에 일일이 상대하고픈 기력이 없었다.




신입생 환영회는 꽤 시시했다.
아니 처음 시작한 대학생화 자체가 꽤 시시했다.

몇 시간 동안의 수업과 빈 시간.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들쑥 날쑥 긴 프렌치 코트를 날리며 눈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김식까지 신경을 긁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본 현주가 며칠동안 쌓인 스트레스와 흥분을 빨개진 얼굴로 토해내는 동안에도 인경은 담담한 시선으로 원망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어기적거리며 참석한 신입생 환영회는 어떻게든 신입생들에게 술을 마시게 하려는 뻔히 보이는 속셈을 가진 선배들과 어떻게든 노련하게 빠져나가면서도 인맥 좋은 새학기를 시작하려는 신입생들 간의 꼬리 감추기 한판이었다.

앞자리에 앉은 선배들이 몇 번씩 바뀌고 그때마다 손에 감긴 붕대에 대해 노골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도 짜증이 치밀었다.
인경은 그저 적당히 술을 들이키며 적절히 분위기에 쓸려가 주었다.

수다와 술냄새와 안주 냄새로 범벅이 된 그곳은 거의 클라이막스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선배들의 그럴싸하게 포장된 무용담 따윈 관심 없던 인경은 제 앞에 놓인 술잔만 비웠다.

어떤 교수님이 학점을 후하게 주는지, 어떤 교수님이 까다로운지에 대한 일장 연설이 끝난 후에는 잡다한 연애담으로 넘어갔고, 음담패설로 진행되었다.
시시하고, 지루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싶을 때가 되었을 때 인경은 취기가 오르는 알딸딸함을 느끼며 밖으로 나왔다.

오후부터 흐려지던 하늘은 밤이 되면서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후두둑, 후두둑
제법 경쾌한 박자감을 내며 비가 바닥에 부딪혔다.

휘청거리며 밖으로 나오자 비 냄새와 밤공기가 선뜻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높은 인구밀도에서 내뱉던 체온과 술 냄새가 가득한 실내에서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입구에 서서 인경은 떨어지는 비를 가만히 쳐다 보았다. 땅바닥에 부딪혀 튕겨지는 빗방울이 꽤 재미있었다.

현관 앞에 공중전화 박스 세 개가 나란히 서서 비를 맞고 있었다.
누군가 전화 하다 동전을 남기고 갔는지 50원 잔액이 깜빡깜빡 신호를 낸다.

무심코 인경은 몸을 일으켜 공중전화 박스로 뛰었다.
잠깐 사이에 후두둑 팔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후경에게 늦는다 전화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인경은 공중전화 수화기를 잡았다. 그리고 전화 번호를 누르려던 순간 후경이 한국에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침에 제 손으로 배웅하고 돌아온 길이 아니던가?

갑자기 허전함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밀려왔다.
지난밤 송별회를 할 때도 아침에 혼자 공항으로 나가는 후경의 뒷모습을 볼 때도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참…… 이젠 없지.”


나직히 혼잣말을 한 인경은 허탈한 듯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이제는 늦어도 늦는다 전화 걸 사람도 없고, 늦은 귀가를 걱정해줄 사람도 없다. 저녁 메뉴를 함께 고심할 사람도, 휴일 스케줄을 의논할 사람도 이젠 없다.
망망대해에 혼자 내버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인경은 엄마 잃은 아이처럼  전화기 박스 밖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쳐다보았다.


울컥하고, 그리움이 밀려왔다.
몇 해 동안 한집에서 복닥거리고 살았던 후경이 그새 그립다.
후경은 아직 하늘에 있겠지?
비가 내리는 검은 하늘을 쳐다보자 왈칵 습기가 눈 안에 차올랐다.

학생회관의 시끄러운 소음이 멀리서 들려오는 듯 아련하게 들려왔다.

“뭐해?”

무게라곤 실리지 않은 산뜻하고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인경은 무거운 머리를 들어 돌아보았다.
가로등 어스름한 불빛을 등지고 빗속에 삐딱하게 서서 저승사자처럼 발간 담배를 물고 있었다.

가장 보고 싶지 않을 때마다 불쑥 불쑥 나타나는 사내는 김 식이다.
아침에 신입생 환영회에는 꼭 참석하라는 당부를 받았음에도 이제야 나타났나 보다.
바깥 바람 냄새를 한껏 묻힌 김식은 빗속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인경 앞에 가만히 섰다.

“비 구경.”

인경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비 구경?”

인경이 말을 앵무새처럼 대꾸하던 김식은 움직일 생각도 없이 가만히 섰다.
침묵이 잠시 내려앉았다.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까맣게 잊은 듯 두 사람은 떨어지는 비를 쳐다보았다.
한사람은 공중전화 박스 앞에 쪼그려 앉았고, 한 사람은 가로등을 등지고 저승사자처럼 서 있었지만 아무런 상관 없었다.
비 냄새가 꽤 좋았다.

"넌?"

한참 후에 인경이 앞에 서있는 김식을 향해 물었다.

"나도 비 구경.“

바쁜 일은 전혀 없다는 듯 김 식이 느리게 말했다.

그리고 담배 한가치를 입에 물었다.
하얀 담배 연기가 몽글몽글 퍼지는 모습이 아릿하게 눈 안에 들어왔다.
불빛 아래 담배를 빨아 당기는 식의 입매가 너무나 맛나 보인다.

“나도 한대 줘.”

인경은 사탕 하나 달라는 어린아이처럼 거리낌 없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김식이 의외다 싶은지 한쪽 눈매가 꿈틀 했다.

"왜?"


인경이 당돌하게 물었다.
마치 여자는 담배 피우면 안된다는 마초냐고 막 따지려는 찰라 김식은 느리게 막 뜯은 담배에서 담배 한가치를 꺼내 내밀었다.

그러나 김식은 움직이지 않고 팔만 내밀었다.
받고 싶으면 인경이 움직이라는 듯 장승처럼 우뚝 서 있다.

인경은 한껏 팔을 내밀었다.
닿을 듯 닿을 듯 담배 한가치가 아슬아슬하게 멀다.

쪼그려 앉았던 인경이 공중 전화 박스 밖으로 한발 움직였다.
팔위로 어깨위로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인경의 손에 겨우 담배가 닿았다.
잠깐 동안 김식의 체온도 닿은 것도 같았다.

인경은 담배를 손안에 들고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아 보았다. 하얗고 날씬한 그것을 입에 물자 박하 향이 나는 것도 같았다.
입에 물고 혀를 내밀어 보자 싸한 냄새가 밀려왔다.

“불!”

인경은 거만하게 턱을 들고 김식을 향해 말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달라고 하기라도 한 듯 김식이 피식 웃었다.

그동안 김식에게 이런저런 괴롭힘을 당한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인경은 거만하게 김식을 쳐다보았다.
마치 인경의 속 마음을 들었다는 듯 김식이 라이터의 불을 켜 내밀었다.
인경은 바람에 흔들리는 라이터 불빛을 잠시 내려다 보다 담배 끝을 갖다 대었다.

빨간 라이터 불 속에 몸을 담군 하얀 담배 가치 끝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불이 붙은 건가? 인경이 막 그런 생각을 하는 찰라 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아 당겨야 불이 붙지.”

김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경은 담배를 힘껏 빨아 당겼다.

“쿨럭, 쿨럭.”

목안을 태울 듯한 매운내와 알싸한 니코틴 냄새가 사정없이 몸 안을 뒤흔들었다.

“역시 처음이군.”

쿨럭, 쿨럭.
마치 속을 뒤집을 듯한 인경의 기침소리에 김식이 혼잣말을 하더니 인경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커다란 손이, 인경의 등을 다 덮을 듯한 큰 손이 인경의 등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그 손에는 다정함은 없었지만 걱정은 묻어 있었다.

“겁도 없이…….”

뭐라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연달아 목안을 간질이는 매운 내에 인경은 계속 기침만 토해냈다.

“쿨럭, 쿨럭.”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세상에 태어나 처음 피워보는 담배 맛은 독했다.
술기운과 모자란 잠 기운에 무겁던 머리가 더욱 무게를 더했다.

한참을 몸이 고꾸라질 듯 기침을 했다.  구토가 치밀 것 같은 어지럼증을 애써 이기며 간신히 기침을 잠재웠다.

찔끔 흘렀던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리곤 인경은 한발짝 뒤로 물러서 다시 빗줄기 아래 선 남자를 향해 불쑥 말했다.

"…나랑 잘래?"

빗속에 남자는 짙은 어둠과도 닮은 트렌치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가만히 서있었다. 갑자기 빗속에 나타났을 때처럼 죽음의 저승사자처럼 크고 묵직한 어둠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의외라는 듯 남자의 눈썹이 묘하게 꿈틀거렸다. 마치 인경의 마음의 경중을 가늠하는 듯……가만히 인경과 시선을 맞추었다.

“동침도 했다며?.”

가만히 쳐다보는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없어 인경은 김식이 했던 시덥잖은 농담을 되돌려주었다.

그러나 김식은 아무런 말도 없이 인경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봄비 아릿한 냄새가 담배 냄새와 어지럽게 뒹굴었다.
더 이상 침묵이 싫어 손을 털며 일어나려는 찰라 김식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건 너무 빠른데. 아직 노래방도 안가고, 커피도 안마셨고, 밥도 안 먹었잖아.?"

전에 인경에게 낙서하듯 써갈긴 글귀가 작업 순서인가 보다.
인경은 피식 웃음이 났다.
노련한 바람둥이처럼 굴더니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 싫어?"
"취했어?"
"싫으면 관둬."
"후회할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선문답처럼 두 사람의 말이 빠르게 오고갔다.

"오리엔테이션땐 꼬시더니 새삼 도덕선생 흉내야?"
"술 기운에 일 벌리고, 해 뜬 다음에 후회하는 거 흉해."
"잔소리 할 거면 그만 둬. 딴데 가서 찾아보지 뭐.? 저 안에 음담패설에 빠져 몸 달아오른 사람 한둘이 아니더만."

한푼어치의 무게감도 없다는 듯 인경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곤 엉덩이에 묻은 먼지라도 털어내듯 인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랫동안 쪼그려 앉았던 다리에 빠르게 혈액이 내달리며 잠깐 절여왔다.
그러나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인경이 정말 가벼운 농담이라도 나눈 듯 냉정하게 얘기를 끝내며 몸을 돌리려했다.

"워, 워. "

지나치게 빠르게 달려 나가는 말의 고삐를 잡아 채듯 김식이 말했다.

“난 또, 나한테 반한 줄 알았더니 …….”
“착각도.”
“그런가? 좀 잘 난 줄 알았는데.”

김식이 씨익 웃었다.
그 모습에 인경도 피식 따라 웃었다.

"구질구질한 소리 집어치워."

인경은 이제 낄낄거리며 웃었다.
오리엔테이션 때 뒷자리에 앉았던 여자들이 떠들던 수다가 갑자기 밀려왔다.
인경은 자신의 농담따윈 잊어버리라는 듯 훠이훠이 손을 저었다.

“그만둬. 쫌 용기가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봐.”
“글세 ....좀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용기가 모자란 건 아니야."

김식의 눈빛이 인경의 표정 하나하나를 관찰하듯 선명하다. 속에서 무언가 치열하게 계산을 하고 있는 듯.

“그러니까 그만두라고.”

인경은 이제 정말 이야기가 다 끝났다는 듯 홀가분하게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리드는 내가 하게 해줘."

인경의 행로를 막으며 노련한 바람둥이처럼 김식이 말했다.

“뭐?”

잠깐동안 인경은 무슨 얘기중이었는지 잊었던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왜? 벌써 후회중이야?”
“아니. 그건 아니야.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 궁금해서.”

인경은 헛기침을 하듯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았다.

"좋아. "

인경은 손을 내밀었다.
담배 한가치를 얻을 때처럼 어떤 무게도 의미도 없이 가볍게 김식을 향해 내밀었다.

인경이 라이터 불빛을 바라보았을 때처럼 김식은 빗방울이 묻은 인경의 손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손안에 들었던 담배 꽁초의 불을 탁하고 튕겨냈다.
여직껏 장승처럼 꼼짝도 않고 서있던 김식이 인경 쪽으로 한발짝 옮겨 인경의 손을 맞았다.

노련한 정치가들처럼 두 사람은 속마음을 감추고 만족한 협상을 한 듯 서로의 손을 맞잡은채 어설프게 웃었다.

의외로 체온은 따뜻했다.
협상은 간단히 끝났다. 마치 이 일의 무게 따윈 솜사탕보다도 가볍다는 듯이.

공중전화박스에 서 있는 인경과 맨 바닥에 서 있는 김식의 눈높이가 똑같아졌다.
김식은 인경의 눈을 들여 보았다.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아무런 감정도 내보이지 않은 시선으로 인경을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갑작스럽게 인경의 입술에 입을 포개었다.
인경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이것도 단지 협상의 일부일 뿐이었다. 악수처럼.

처음 맛본 키스는 비 냄새와 짠맛이 났다.



*****

두 번째 키스는 아무 맛이 없었다.
매끈한 혀가 입안으로 거침없이 밀려 들어와 인경의 혀를 희롱할 때 인경은 자신의 몸 위로 쏟아지는 김 식의 체중이 무거웠을 뿐이다.

“집중해.”

입술과 입술을 맞댄 채 김식이 잔뜩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김식의 움직이는 입술모양 그대로 인경이 입술도 따라 움직였다. 서툰 바람둥이처럼 인경의 돌발제안에 머뭇거리던 김식은 이제 노련한 바람둥이처럼 굴었다.

“집중하고 있는데?”

냉큼 대답을 되돌리며 인경은 방금 김식이 자신에게 했었던 것처럼 혀를 내밀어 김식의 입술을 핥았다.
욕망이라곤 한 푼어치도 묻어있지 않은 시신으로 인경은 김식을 올려다보았다.
어설픈 어둠 속에서 쿡쿡, 낮게 김식이 웃었다.

커다란 김식의 손이 흐트러진 옷자락 사이로 인경의 가슴을 찾아냈다.
인경의 등을 다 덮을 것 같았던 커다란 손이 말캉한 가슴을 잡아 희롱했다.

김식의 입술이 즙이 많은 과일을 게걸스럽게 베어물 듯 인경의 가슴을 베어 물었다.
살짝 이빨이 눌리는 기분에 인경은 살짝 인상을 썼다.
인경의 기분 따위는 모르는 듯 이번엔 혀끝으로 인경의 유두를 살짝 핥았다.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몇 번이고 혀를 내밀어 뾰족하게 고개를 든 유두를 희롱했다. 김식은 그것이 재밌는 듯 여러 번 반복했다.
살짝 머리를 들어 시선을 내리자 가슴을 탐닉하느라 정신없는 까만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김식이 고개를 들었다.
인경과 김식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재미없어?”

인경은 재빨리 도래도래 고개를 저었다.
어둠 속에서 다시 김식이 쿡 웃었다.
인경의 몸 위에 체중을 반쯤 걸치고 있던 김식이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잔뜩 긴장한 주제에…….”

혼잣말을 하듯 툭 내뱉은 김식의 말했다.

“누가 긴장을 해?”
“허리 좀 들어.”

바로 반격을 시작한 인경의 말을 무시한 김식이 짧게 명령했다.
인경의 바지가 벗겨졌다.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길게 망설였던 것과는 반대로 김식은 신속하게 인경의 속옷까지 단번에 벗겨냈다. 그리곤 자신의 몸에 걸치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냈다.

김 식이 맨 몸이 빠르게 드러났다.

“지금도 늦지 않았는데…….”
“꽤 말 많네.”

김식의 말에 인경이 빠르게 대꾸했다.

“부끄러워 하기는…….”

피식 웃는 것 같더니 김식의 체중이 다시 인경에게로 실렸다.
다시 입술과 입술이 만났다. 축축하고 온기를 가진 혀가 살짝살짝 허락을 얻듯이 인경의 입술을 핥더니 이내 입안으로 침입했다.

몸을 내리누르는 체중과는 또 다른 날카롭고 묵직한 무엇가가 허벅지를 불편하게 자극했다.
마치 불덩이 같기도 한…….

인경은 끄응 낮게 신음하며 허리를 틀었다.
김식의 손이 인경의 손을 끌어다 불덩이로 이끌었다.

난생처음 손에 닿은 그것은 정말 용암덩어리처럼 뜨거운 것 같았다.
그리고 쇠뭉치처럼 무거운 것 같으면서도 말캉하고 보드라운 젤리 같기도 했다.
낯선 느낌에 인경은 그것을 손안에 꽉 쥐었다 힘을 풀었다 울퉁불퉁한 혈관이 느껴지는 대로 엄지손으로 쓸어내렸다.

이번엔 김식이 끄응 신음을 냈다.

“다리 좀 벌려 봐.”

인경은 착한 학생처럼 김식의 말을 따랐다.

가장 깊은 붉은 속살에 단단하고 공격적인 그것이 와 닿았다 싶은 순간 그것은 거침없이 안으로 진격했다.

“아앗.”

주저없이 진격하던 김식이 인경의 비명소리에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최초는 무언가로 후려 맞은 듯한 느닷없는 고통이었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불편함이었다.
내것이 아닌 것이 내 안을 차지하고 있는 낯선 이물감....., 그리고 몸을 내리누르는 건장한 사내의 무게와 체온. 모든 것이 불편하고 낯설었다.

인경은 저도 모르게 몸을 틀었다.

“역시 처음이네.”

김식이 인경의 움직임에 무거운 신음을 하며 속삭였다.

“끝이야?”

조심스럽게 묻는 인경의 질문에 김식은 대답대신 혀를 내밀어 인경의 귓불을 핥았다.

“그럴리가…… 시작이지.”

동시에 김식이 느리게 진격을 시작했다.
인경의 몸을 달래려는 듯 느리게... 그렇지만 단호하게 진입을 시도했다.
하나로 꼭 맞닿은 두개의 몸이 같이 움직였다.
최초의 비행기를 탄 비행사처럼 인경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김식은 인경이 비행기에서 떨어질 새라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고는 진입과 후퇴를 하며 인경을 이끌었다.

어느 순간 인경도 김식의 어깨를 잡았다.
드러난 맨살이 단단했다.
시험 삼아 인경도 이를 세워 김식이 자신의 가슴을 베어 물었을 때처럼 어깨를 물었다.

살 냄새와 알 수 없는 욕망의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허억.”

김식이 신음을 흘렸다.
인경은 재밌다는 듯 이번엔 다른쪽 어깨로 옮겼다.
살짝살짝 이를 세워 단단하게 뭉쳐진 근육을 베어물었다 놓았다 혀를 내밀어 맛을 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신음을 흘리는 김식의 반응이 꽤 재밌었다.
거친 숨소리가 고스란히 인경의 입술위로 귓가로 머리카락 위로 떨어져 내렸다.
처음의 낯선 불편함과 이물감이 익숙해진다 싶을 때 김 식은 오르가즘에 올랐다.

처음 경험한 섹스는 잠깐의 고통과 불편함과 아릿한 피 냄새가 날 것 같은 단단한 근육의 맛만 기억에 남았다.
몸을 태울 것 같은 극렬한 오르가즘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활화산 같은 애틋함도 없었다.

맞닿은 낯선 남자의 체온이 불편하지 않을 뿐이었다.



“아빠 보고 싶어, 아빠.”
“아빠를 지금 어떻게 봐.”
“싫어, 싫어. 아빠 보고 싶단 말이야.?”

까만 어둠의 장막이 두껍게 내려진 깊은 밤, 며칠째 집에 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다 인경은 울음을 터뜨렸다.
떼를 쓰는 인경을 달래려 엄마가 한껏 감정을 억누르며 설득하려 했지만 어린 인경은 이해되지 않는다.

어제도 그제도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은 들어오겠지 종일 기다렸건만 아빠는 오늘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음식냄새 배인 커다랗게 믿음직스런 팔에 안겨 어리광부리고 싶건만 더 이상 아빠는 집에 들리지 않았다.

“시끄러. 그만 울지 못해?”

짜증이 복받친 엄마가 모진 얼굴을 하고 날선 시선을 했지만 인경의 울음소리는 한층 더 커졌다.

“엄마 미워. 으앙.”
“엄마한테 무슨 말 버릇이야?”
“아빠 보고 싶어, 아빠.”

두 다리를 마구 밀면서 점점 더 목소리를 높이며 떼를 써대는 인경의 목소리에 잠이 들었던 언니들도 하나둘 깨어났다.

“아빠한테 데려다 줘, 아빠아아아.?”

처량맞고 고집스럽게 울어대는 인경의 목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위로 뻗어 나갔다.

“이 지지배가 정말.”

달래다 달래다 지친 엄마가 매를 찾아왔다.

“뚝 그치지 못해. 엄마한테 맞아볼래?”

시퍼렇게 날이 선 엄마의 얼굴이 무서워 인경은 더 소리를 높였다.
찢어질듯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온 집안을 흔들어댔다.

“우어어어엉. 아빠, 아빠아아.”
“아빠는 이제 안와. 안온다구.”

한계까지 다다른 엄마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철썩.
인경의 팔을 거칠게 잡아챈 엄마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해 모질게 인경의 엉덩이를 때렸다.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들어. 아빠는 이제 안 온다구. 어?”
“우아아아아앙.”

철썩.
다시 엉덩이에 모진 매 한 대가 떨어졌다.

“날더러 어쩌라구? ”

철썩.

“너만 아들로 태어났어도. 너만. 이것아. 왜 이렇게 속상하게 해.”

엄마의 목소리엔 울음이 녹아 있었다.

“우아아아앙.”
“훌쩍.”

인경의 큰 울음소리 뒤로 잠에서 깨어난 후경이 숨죽인 울음을 보태었다.

“아빠 이제 안 와?”

울먹거리는 후경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안 와. 이제 이 집에 안온댄다. 미스 김 하고 산 댄다. 니 아버지가 우리 다 버리고 미스 김하고 산 댄다.”

마치 피를 토해내듯 엄마가 악을 토해냈다.
그 뒤에 나경과 선경이 억누른 울음을 보태었다.

“우아아앙, 나는 미스김 언니랑 살꺼야.”

철딱서니 없는 어린 인경의 말에 기어코 엄마는 맥을 놓았다.

“그래, 가서 살아 이것아. ”

매를 놓친 엄마가 허허로운 손으로 인경의 등을 내려쳤다.

“니 애비랑 미스 김이랑 잘 먹고 잘 살아, 이것아.”

엄마가 기어이 통곡을 터뜨렸다.

“아이고, 내 팔짜야. 내 배로 난 딸년도 날 싫다는데 서방인들 좋다고 하겠어. 아이고 내 팔짜야.”
“엄마아아.”

무릎 걸음을 걸어 엄마 곁으로 온 선경이 엄마를 껴안고 울었다.
그 옆에 나경이 선경을 끌어안고 훌쩍훌쩍 울었다.

깊은 밤 때 아닌 통곡이 온 집안을 들썩였다.


어쩌면 눈물이 흘렀던 것 같다.
잠든 눈꺼풀위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눈물이…… 흘렀던 것도 같다.
아주 오래 전 통곡하듯 서럽게 울었던 그 밤의 눈물이 다시 뺨으로 흘렀던 것도 같다.

“괜찮아 …… 쉬잇. 괜찮아.”

아빠를 닮은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등을 쓸어 내린 것도 같다.
뺨 위로 흐른 한줄기 눈물위로 부드러운 입술이 조심스럽게 닿았다.
달래듯, 위로하듯, 부드러운 그 입술은 다정하고 따스했다.

꼭 끌어안은 맞닿은 심장소리가 오래 묵은 상처위로 겹쳐졌다.






==> 이번 이벤트때 올렸던 피노키오의 꿈입니다.
하도 오랜맨에 글을 썼더니, 왜 이리도 딱딱 끊어지는 느낌이 나는지...원.-.-;;;

대사와 분위기가 올챙이 국수처럼 툭툭 끊어져 난감지경입니다.
뭐... 곧 맘속에서 퐁퐁 솓아날 날이 오지 않을까... 고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