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리엔테이션은 특별할 것도 없는 고등학교 시절 조회의 연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눠준 프린트 물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고, 교가를 배워보자며 테이프로 교가 몇 번을 반복해서 틀어준 게 다였다.
특별히 신기할 것도 없어 학생들은 듣는 둥, 마는 둥 대부분이 딴 짓이었다.

부시럭, 부시럭.
옆에 앉은 남자도 별다를 것이 없었다.
커다란 덩치의 남자는 딱딱하고 좁은 의자가 불편한지 연신 몸을 꾸물거렸다. 한껏 오른쪽으로 붙어 앉았으나, 슬쩍슬쩍 부딪혀 오는 솜씨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교묘했다.

일부러 신경을 자극하고, 시비를 거는 것 같았다.

다시 어깨를 툭 부딪혀 왔다.
날이 선 눈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남자는 싱긋 웃기까지 한다. 그러더니 인경의 프린트 물 쪽으로 몸을 구부리고, 무언가 끼적거렸다.

[커피 할래?]

장난질을 하는 건가?
대꾸할 필요도 없어 팩하니 고개를 돌리자, 쿡하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뒤쪽에 앉은 무리들이 흘긋흘긋 인경과 남자를 쳐다보며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렸다. 남자가 무슨 내용을 썼는지 잔뜩 궁금한 모양이었다.

남자가 인경의 팔을 툭하니 치더니 다시 종이 위로 시선을 흘깃 거렸다.

[노래방은?]

점점 더…….
이번에도 무시하며 고개를 돌리려는데 입가를 말며 씨익 웃는 남자가 종이 위에 글자를 휘갈려 썼다.

[밥(食) 먹으러 갈래?]

의도적으로 밥 글자 뒤에 한자를 넣었다. 밥과 남자의 이름이었던 김 식을 교묘하게 섞어 인경을 놀리고 있었다.
인경의 눈썹이 험악하게 꿈틀거렸다. 인경은 남자가 들고 있던 펜을 모질게 빼앗았다. 그리고 종이 위에 크게 글씨를 적었다.

[염병.]

크크크크
마이크를 잡고 앞에서 떠들고 있는 사람을 의식한 숨죽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남자가 인경의 귀 쪽으로 몸을 바짝 낮췄다. 갑자기 친밀하게 다가오자 인경이 놀란 듯 물러섰으나, 등은 딱딱한 의자 등받이로 막혀있다.

"앙탈도 제법이야."

따뜻한 입김에 오싹 한기가 등뒤로 내달렸다.


지루한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마자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길고 지루한 시간동안 내내 옆에서 치근덕거리는 남자 때문에 두통이 생길 것 같았다. 건조한 히터의 온기를 벗어나 찬 공기를 마시자 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인경은 빠른 걸음으로 현주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서둘러 갔다.
그러나 황량한 들판에 벌거벗은 남자 전신상이 힘겹게 지구본만 떠받들고 서서 모진 겨울 바람을 맞고 있었다.
단대 별로 시행한 오리엔테이션이 점차 끝나는지 오고가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발돋움을 하고, 고개를 빼고 혹시 현주가 오나 살펴보았지만 무채색의 코트를 입은 학생들의 모습 사이에서 현주는 보이지 않는다.

심심한 김에 현주를 마중하기로 작정하고 인경은 예술대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청량 고추만큼 매운 바람이 등을 때리며 지나갔다.
예술대 쪽으로 가는 길은 지나치게 한산했다.
터덜터널, 한가하고 느리게 산책하듯 걸었다. 곧 봄 향기를 가져올 키 낮은 개나리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쳐다보기도 하고, 길 건너 빽빽하게 나무가 들어선 작은 동산도 보았다.

햇살이 겨울 바람을 달래듯 내리쬐는 넉넉한 길이었다.

캠퍼스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한 예술대는 흔히 학교 안 독도라고도 부른다. 음대생들을 위한 배려인지는 몰라도 학생식당이나 기타 편의시설과 지나치게 동떨어져 있다. 게다가 가는 길목도 으스스한 것이 뒤쪽으로 의대 건물을 공사하느라 더할 나위 없이 을씨년스럽기도 하다.

겁 많은 현주가 주눅들기 딱 좋은 길이다.
이왕 선심 쓰는 김에 좀더 마중 나갈까 싶은 마음에 인경의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부아아아앙.
요란한 바이크 소음이 등뒤 쪽에서 들려왔다.

인경은 인도 쪽으로 좀더 들어서며 무심히 바이크 소리를 흘려 들었다. 시꺼먼 옷을 입은 사내가 헬멧도 없이 빠르게 지나쳐갔다. 아직 오리엔테이션 학생들이 가득 들어찬 캠퍼스 안에서 조금 빠른 속도다.  

부웅, 부웅.
지나쳤던 바이크 소음이 다시 커졌다싶더니, 인경의 주변을 의도적으로 한바퀴 돌고는 바짝 다가왔다.
거친 시동음을 울리며 오토바이 두 사람의 등뒤에 바짝 붙어 일부러 소리를 내고 있는 듯 위협적으로 으르릉 거렸다.

선뜻한 감각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오토바이에 올라탄 사람은 까만 트렌치 코트 차림의 그 사내다.
김 식이라고 했던.

ꡒ뭐 하는 짓이야? 위험하게.ꡓ
ꡒ밥 먹으러 가자.ꡓ

그게 목적이었던 듯 단숨에 말을 토해내는 남자는 직설적이었다.

인경은 빤히 남자를 노려보았다.
햇살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바이크에 남자는 나른하게 팔을 손잡이에 걸치고 인경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거절을 못 알아먹는 건 천성이니? 궁상이니?"
"글세……."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과라고 하자. 아까 그 딱따구리들이랑 일행인줄 알았거든."

오리엔테이션 내내 집요할 정도로 지분거리고, 약올리더니, 의외로 순순히 시인했다.

인경은 바이크에 앉아 있는 남자를 훑어보았다.
비틀린 녀석.
고깟 소문 나부랭이 몇 개 나불거렸다고 골탕을 먹이다니.
약이 올랐다.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후까시 그만 잡고 이제 비켜줄래?"

팽팽하게 시선 줄다리기를 했다.
뭔가 더 할말이 있는 듯한 남자는 아직까지 갈 생각이 없는 듯 한가하게 노려보는 인경의 시선을 즐기는 듯 했다.

"인경아."

고작 두시간 사이인데 10년 만에 만난 님을 보는 것처럼 현주가 인경을 발견하고  얼굴이 활짝 펴졌다. 주눅든 어깨를 보아하니, 꽤나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인경?"


마치 친구도 다 있었네 하는 의외의 시선으로 현주를 보더니, 낮게 휘파람을 불어댄다. 그리곤 선머슴아 같은 인경의 차림과는 다른 두 사람의 어울림이 신기하다는 듯 번갈아 노골적으로 비교를 한다.

ꡒ밥은 다음에 같이 먹어야 겠네. ꡓ

밥에 유난히 악센트를 주는 꼴이, 어쩐지 밥식자를 한자로 써넣던 노골적인 추근거림이 다분했다.

"또 보자. 인경. "

부아아아앙
오토바이가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인경과 현주가 선 자리를 선회하더니 방향을 틀어 지나갔다.

"누구야? 설마 그새 연애 시작이라도 했어?"
"미쳤냐. 저렇게 비틀리고, 재수 없는 놈은 싫다. "

호기심에 현주의 눈이 반짝거렸다.

"무슨 레인저 같다. 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있었잖아. 까만색 바바리 풀어 헤치고, 오토바이 타면서 현상금 사냥꾼 노릇 하는 남자. 너도 봤지?"
"레인저는 얼어죽을. 내가 보기엔 딱 저승사자 같다야."
"아아, 긴장했더니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현주가 쫄랑쫄랑 걸어와 인경의 팔을 감았다. 데이트하는 연인처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


"인경아아아, 밥 먹자."


저녁밥은 퇴근하고 자신이 할거라면서 인경에게 꼭꼭 다짐을 받은 후경이 좁은 집이 쾅쾅 울리도록 소리쳤다.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듯 얼굴은 콧노래라도 부르는 혈색이다.

"돼지고기 듬뿍 넣었다."


아직 남아있는 김장김치로 끓인 김치찌개가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김을 내며 끓고 있다.

방금 막 지은 고슬고슬한 밥에 현주네 집에서 얻어온 소고기 장조림과 봄 냄새 가득한 겉절이 멸치 볶음이 함께 상위에 올려졌다.

"현주네 갔었어?"
"어."

고등학교 시절부터 간간이 반찬을 공수해오는지라 후경도 단번에 알아챈다.

어릴 땐 제일 많이 투닥거리던 두 사람이 이젠 가장 친밀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시집간 두 언니들과는 아마도 같이 부대끼는 시간이 적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느새 인경은 후경을 많이 따르고 있었다. 마치 엄마처럼…….

이혼한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아버지의 가게가 보이는 길 건너에 화장품가게를 연 엄마 대신에 후경과 보내는 시간이 많기도 했었다.

"나, 사표 냈어."

마치 오래 동안 묵었던 떼를 벗겨 낸 것처럼 개운한 얼굴로 후경이 말했다. 빤히 인경을 쳐다보는 눈매엔 칭찬해 줘 하는 어리광도 숨어 있는 것도 같았다.

"잘했네."

별로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인경은 쿨하게 대꾸했다.
여태 직장생활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은 것은 아니지만, 퇴근하고 들어서는 후경의 발걸음의 무게를 봐선 녹록치 않은 일이었던 것 같았다.

"다른 일자린 구했어?"

찌개 뚝배기에서 꺼낸 뜨거운 두부를 후후 불면서 살짝 깨물었다. 뜨거운 기운이 이빨까지 훅하니 끼쳐왔다.

"앗, 뜨거라."

입안에서 어찌어찌 목으로 넘겼건만, 목이 불이라도 난 듯 뜨겁다.
인경은 급하게 주먹으로 가슴을 통통 때렸다. 식도를 넘어가는 뜨거운 두부가 그렇게 하면 빨리 내려가기라도 하려는 듯.

"천천히 먹어."

후경이 재빨리 물 컵을 내밀었다.
인경은 물 컵을 받아 꿀꺽꿀꺽 달게 마시자 가슴을 뜨겁게 하던 기운이 차차 사라졌다.  

"후우 이제 살겠다."
"나, 유학 갈 거야."

후경은 마치 내일 소풍 갈 거야 하는 투로 간단하고 당연하게 말했다.

"유학? 갑자기 웬 유학?"

막 밥을 뜨려던 숟가락을 멈추고 인경은 후경의 얼굴을 뜨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자다가 남의 허벅지 긁는 듯한 시선으로 후경을 보며 인경은 가볍게 물었다.
손바닥만한 집안은 난방으로 훈훈하게 데워져 있었고, 찌개냄새가 가득 퍼진 여느 날과 다름없는 저녁이었다.

"그렇게 됐어."

그러나 후경은 농담이 아닌 모양이었다.
인경은 후경의 표정을 꼼꼼히 살폈다.
위로 언니 둘은 시집가서 자기 가정을 꾸린지 오래고, 이혼한 엄마는 조그마한 화장품 가게를 하나 꾸려 하다가 삼 년 전에 연하의 남자와 살림을 차리는 바람에 셋째 언니와 함께 한집 살게 되었다.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나지만 삼 년 동안 둘만 살다보니 이제 표정만 봐도 기분 정도는 저절로 알게 되었다.

"언제?"
"이주 뒤에."

후경의 말투는 명쾌하고, 단호했다. 인경의 어떤 말도 자신의 뜻을 바꾸는 데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듯.

"2주?"
"어."

갑자기 찬 물 벼락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입 밖으로 낸 말은 쉽게 뒤집지 않는 성격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 결정해놓고 통보를 할 줄은 예상 못했다.

"준비는 다 끝났어?"
"어."

인경의 시선을 슬쩍 피하는 후경이 찌개 냄비에 돼지고기를 고르는 척 하며 휘적거렸다.

인경은 어쩐지 배신감을 느끼며 놀라 커진 눈으로 후경을 바라보았다.
준비가 다 끝날 때까지 한마디 말도 없다가, 이렇듯 뒤통수치는 것은 어릴 때 인경의 사탕을 빼앗아 먹을 때처럼 가차없었다.

어릴 때부터 공부에 욕심이 많은 후경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떠나고 집안이 몰락하듯 가세가 기울면서 인경까지 책임을 맡게 된 이후로 한번도 내색한 적도 없었다. 대학 졸업하고 일년이나 여행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유학이라니……. 지나치게 급작스러웠다.

"그래서 말인데……."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던 후경의 목소리가 갑자기 느려졌다.
무언가 망설임이 묻어 있는 듯 조심스럽기도 하다.

"이 집 뺐어."
"뭐?"
"열흘 후에 비워 줘야 해."
"뭐?"


참고 있던 긴장감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갑작스런 유학통고도 정신없는데, 연타 공격은 지나치게 빠르고, 모질었다.
인경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손에 잡은 숟가락이 몸을 보호하는 무기라도 되는 듯 꼭 움켜쥔 채로.

"언니."
"나도 할 만큼 했어. 너 학비까지 해줬으면 엄마 노릇도 잘 한 거잖아. 그러니 이젠 내 맘대로 할래."
"그래도 이건……."

인경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후경의 말이 맞다.
엄마 대신에 엄마 노릇을 한 건 후경이었다.
후경은 진도 9의 지진에도 끄떡없을 만큼 견고한 고집으로 인경을 마주 보았다.

"반절 정도는 남겨주고 가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깐 모자라서 다 들이밀어야 할 것 같아. 미안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인경이 진짜 봐줘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처음부터 후경에게 더부살이는 하는 것은 인경이었으니까.

"갑자기 그러면 어떡해? 당장 어떻게 하라고?"
"이제부터 너가 알아서 해. 나이 스물이면 너도 성인이잖아."
"그렇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나도 미리 준비할 시간을 줬어야지."
"나도 오랫동안 망설였어. 너 때문에 갈까 말까 계속 망설였다고."

후경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경과 시선의 높이가 같아졌다.
속에 할말이 많은 두 자매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나도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래. 변덕스러운 독일 날씨도 느껴보고,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어. 공부도 하고, 이왕이면 독일 남자 만나서 결혼도 할거야.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거야."

후경이 폭포처럼 속내를 쏟아냈다.

"한국 남자들 쳐다보는 것도 지긋지긋해. 잘난 것은 쥐뿔도 없으면서 손가락에 물 묻히면 고추 떨어지는 줄 아는 맹추들이야. 그깟 게 뭐라고? 웃기고 있어, 정말."

팔짱을 낀 후경은 눈앞에 따지고 싶은 상대가 있기라도 하듯 언성을 높였다. 얼굴도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그동안 꾹꾹 속에 눌러놓은 것이 많았나보다.

"갑자기 일이 빨리 진행 되서 미리 말 할 짬을 놓쳤어. 미안해."

후경의 눈동자에 물기가 스몄다.
오랫동안 인경 때문에 망설이고 망설였을 고뇌가 인경에게도 전해져왔다.

"알았어. 언니가 가고 싶다면 가야지. 언니 말대로 나도 어른인데, 내 앞가림 정도는 해야지."

인경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충격의 강도를 들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해 표정을 감추었다.

"얼른, 집부터 알아봐야겠네."

울컥, 속에서 치미는 물기를 억세게 누르며 인경이 말했다.
재수 없는 꿈으로 시작한 하루의 마감치고는 꽤 어울리는 마무리였다.  

"좀 더 빨리 말해줬으면 기숙사부터 알아 봤을 텐데……."

이제껏 함께 있어 준 언니가 미련 없이 떠난다고 하니, 서운했다.
같이 살 땐 늘 투닥 거리며 싸우기도 많이 했는데, 보호막에서 팽개쳐진 것처럼 허전하기도 했다.

"안되면 현주네 집이라도 쳐들어가지 뭐. 착한 친구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오래 걱정했을 언니를 향해 인경은 씩씩하게 미소 지었다.

대학 입학식을 1주일 앞 둔, 아직은 겨울의 시샘이 남아있는 어느 초봄에 인경은 세상에 홀로 팽개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