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아아아가 매여놓은 새에끼주울 따라
나아팔 꽃도 어울리게
피었스읍니다.

둘째인 나경과 후경이 나란히 서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새끼 제비처럼 입을 쪽쪽 벌리고 있다.
두 손을 꼬옥 마주 잡고 리듬을 세듯 위 아래로 움직이며 곱게 입을 벌린 셋째 언니 후경과 화음을 넣는 둘째 나경의 목소리는 푸른 물이 묻어 날 것처럼 청아(淸雅) 하고 고왔다.

피아노 반주는 큰언니인 선경이 맡았다. 마치 무대에서 공연을 하듯 할머니와 엄마와 아빠를 향해 서서 실력을 뽐내었다.
인경은 아빠 무릎에 앉아 공연에 참석하고 싶어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이구, 잘한다. 내 새끼들."

할머니가 대견하고 기특해서 손바닥을 부딪혀 박수소리를 크게 냈다. 엄마는 그 소리에 어깨를 살짝 세우며 으스댔다. 딸만 넷을 줄줄이 낳았다고 은근슬쩍 구박을 늘어놓는 할머니이지만, 곱게 차려 입힌 딸들을 바라보자니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노래는 2절로 넘어갔다.  

애들하고 재밌게 뛰어 놀다가
아빠 생각나서 꽃을 봅니다.
아빠는 꽃 보며 살자 그랬죠
날 보고 꽃같이 살자 그랬죠

담장가엔 커다란 백목련이 만개했다. 하얗고 탐스러운 꽃송이가 진한 향기를 뿜으며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가족들을 키 높여 훔쳐보고 있었다.

“박수."

노래가 끝나자 엄마가 입으로 큰 소리를 내며 박수를 쳤다.
할머니도 아빠도 큰 소리로 박수를 치자 고운 원피스를 차려입은 두 자매가 아빠를 향해 달려왔다. 나풀나풀 고운 원피스는 나비의 날개처럼 살랑거렸다.

“아빠, 몇 점이야?"

11살 후경이 어리광을 부리듯 여전히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인경을 슬쩍 밀치며 물었다.

“백 점."
“와아 정말?"
“왜 자꾸 밀어?"

후경이 미는 것이 못마땅한 인경이 앙칼지게 소리를 높여 후경을 쏘아보았다.

“넌 여태 아빠 무릎에 앉아 있었잖아."

후경도 지지 않겠다는 듯 인경을 홀겨 보았다.

“후경인 이쪽으로 앉아라."

얼굴에 주름이 가도록 활짝 웃는 아빠가 나머지 한쪽 무릎을 후경에게 선심 쓰듯 내주었다.

“아빠 나는 요?"

이번엔 13살 나경의 눈이 새치름해졌다.

“여기 가운데가 남았네."

아빠의 말이 끝나자 마자 나경이 가운데로 엉덩이를 들이밀어 앉는다.

“지지바들이 아빠를 다 잡겠네, 잡겠어. 머스마가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할머니의 탄식 같은 소리가 매서운 회초리처럼 요란한 소음사이로 달려들었다. 아빠도 엄마도 못들은 체 한 그 말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가슴에 빨간 상흔 한 줄을 남겼다.

“아구야, 얘들아 아빠 다리 부러지겠다. 얼른 내려라."

신경질적으로 야단을 치며 엄마가 나경의 팔을 잽싸게 잡아 끌어냈다.

"엄마는, 맨날 나만 그래?"
"넌 다 큰 게 왜 그러냐?"
"냅 둬. 애들이 다 그렇지 뭐. 나경이 얼른 이리 와 앉아라."

허허 웃는 아빠의 목소리에 나경이 야단을 치려던 엄마를 향해 메롱하며 혀를 내밀고는 다시 아빠의 다리사이로 앉았다.

"선경이 피아노 좀 쳐 봐라."
"아빠, 나도 피아노 배우고 싶어.응?"
"인경인 학교 가면 그때 갈켜 줄게. 그때까지 기다려라, 알았지?"
"정말이지? 약속."

크고 듬직한 아빠의 손안에 조그마한 인경의 손가락이 걸렸다. 절대로 어기지 말라는 듯 인경은 아빠와 새끼손가락을 꼭꼭 걸었다.

"도장도 찍어 줘."
"알았다, 도장."

후경이 샘통 난 얼굴로 그런 인경과 아빠를 쳐다보았다.

"난 아빠한테 시집 갈 거야."
"바보, 어떻게 아빠한테 시집을 가?"
"난 갈 수 있어!"

말끝마다 시비를 거는 후경이 얄미워 인경의 눈이 다시 샐쭉 얇아진다. 후경은 몰래 인경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늦둥이 인경이 태어나고 부터 막내 자리를 빼앗긴 것이 분해 은근히 심술을 놓았다.

"아야!"

인경이 과장되게 비명을 지르자 아빠가 화들짝 놀라며 인경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인경이 왜?"
"언니가 꼬집었어."
"내가 언제!"

팽하니 돌아선 후경이 턱을 치켜세웠다. 아빠의 턱에 얼굴을 부비는 인경이 얄밉기만 한 후경이었다.

아빠의 냄새는 참 좋다.
기름 냄새와 양파냄새 그리고 밀가루 냄새가 몸에 배인 아빠에게는 맛있는 냄새가 난다. 그것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자장면 냄새이기도 했다.

선경이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15살 선경이 그동안 배운 실력을 발휘하려 열심히 건반을 두드렸다. 크고 하얀 손이 하얗고 까만 건반 위를 날 듯이 오르락 거리며 음을 만들어 냈다.
제목은 알 수 없지만,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피아노 곡이 한가롭고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에 정겨운 가족들의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헉."

인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불을 걷고 천천히 일어났다.
손바닥으로 천천히 세수를 하듯 얼굴을 문질렀다. 심장이 오래 달리기를 한 것처럼 급격히 신선한 산소를 요구하며 들뛰고 있다.

꿈이다.
그것도 가장 재수 없는 꿈.
이미 오래 전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작은 편린(片鱗)이 반란을 일으킨 듯 해묵은 상처가 벌어졌다.

"염병……."

빈속에 쓴 물이 치밀고 올라왔다.
왜 하필…….
오늘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오리엔테이션 날이다.
하필이면 이런 날에 가장 재수 없는 꿈을 꾸다니. 불쾌감이 몽글몽글 뭉쳤다.

어릴적 할머니가 하던 것처럼 침을 세 번 뱉어내고 싶은 충동이 왈칵 일었다.

한기가 오싹하니 옷가지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해가 겨울 바람과 함께 들어왔다. 여름엔 작은 바람조차 들이지 못하는 반지하 방의 조그만 창문이 겨울엔 황소바람을 몰고 틈새로 밀어닥친다.
인경과 후경이 꼼꼼히 비닐로 덧대어 보기도 했지만 엉성한 솜씨에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비늘은 다 떨어져 버렸다. 창문 틈새로 불어드는 바람의 한기는 이제 익숙하게 방안을 염탐을 한다.

인경은 꿈을 떨치듯 이불을 완전히 걷어내고 일어섰다.
온기가 빠져나가고 한기가 빠져나간 방에 마음을 다지듯 인경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으갸갸갸갸."

새로운 시작을 할 때이다.
해묵은 기억 따위에 굳이 휘둘릴 이유가 없다. 개꿈 따윈 오늘의 기운찬 시작을 방해할 수 없다.
인경은 꿈의 잔재를 기지개 한번에 털어 내려 길고 나른하게 몸을 쭈욱 폈다.

한쪽 벽에 얌전히 걸려있는 옷이 눈에 들어왔다.
대학에 입학한 인경을 위해 언니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모아 사준 얌전한 정장 한 벌이 입학식을 기다리며 걸려있다.
어울리지도 않을 옷 따윈 사지도 말라고 했건만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라며 굳이 떠안긴 정장은 신입생다운 초보 티가 풀풀 풍겨나는 옷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서자 방보다 더한 한기가 밀려왔다.
손바닥만한 집안에 손가락만한 거실엔 이른 아침 출근한 후경이 준비해놓고 간 아침상이 얌전히 인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웃으며 인경은 양치질을 하기 위해 욕실로 걸어갔다. 재수 없는 꿈따윈 휘발성 물질처럼 벌써 날아가 버렸다.

************

교문 앞에 서 있는 현주가 인경을 보자마자 손을 크게 흔들었다. 캠퍼스 안으로 줄줄이 들어가는 학생들 사이에 가만히 서 있는 현주는 멀리서도 단번에 눈에 띄였다.

"빨리 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릿느릿 걷는 인경이 답답한 듯 현주는 손을 흔들었다.
어깨를 덮는 머리길이에 얌전한 머리띠를 하고 까만색 정장 자켓에 주름치마까지 입은 현주는 부잣집 공주님 다운 모습이었다. 신입생다운 모습이라기보다 음전한 숙녀다운 모습이다.

지나는 남학생 몇몇이 힐끗거리고 스쳐가건만 본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다. 다소 눈치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인경의 다소 까다롭고 독선적인 성격까지다 받아주는 착하기 그지없는 친구다.

"왜 이렇게 늦었어?"

하얗게 입김이 나오는 바깥에서 꽤 오래 기다렸는지 입술이 파랗게 얼어있다.
현주가 미리 와서 기다린 것이지 인경이 늦은 것은 결코 아니다.

"밥 먹고 나오느라고."

인경은 늦은 게 전혀 미안하지 얼굴로 느릿느릿 대꾸했다.

"옷은 또 그게 뭐고?"

짧게 자른 커트 머리에 아무렇게나 주워 입은 청바지에 모직 코트 차림은 신입생보다는 고등학생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뭐가 어때서? 춥지만 않으면 되지 뭐."

다소 선머슴아 같은 모습에 여고 후배들한테 연애편지도 종종 받곤 했던 인경이다. 신입생이 되는 첫걸음인 날에도 털털하게 나타난 인경의 무신경함에 현주가 못참고 일침을 가했다.

"얘는 그래도 오리엔테이션인데."
"내 외모를 오리엔테이션 한 대냐?"
"언니들이 옷도 사줬다면서?"
"쪽팔리게 그런 옷을 어떻게 입고 와."
"어우, 은근히 꼬였다니깐."

현주의 구두가 인경의 운동화 옆에서 햇살에 반짝반짝 빛난다.

"얼른 가자."

현주가 살갑게 인경의 팔을 감아온다.
바람에 가벼운 꽃향기가 풍겨왔다. 어느새 숙녀 티를 내려는 모양인지 향수까지 뿌리고 나온 현주의 모습에 인경은 가볍게 웃었다.

"먼저 끝나도 기다려야 해."
"알았어."
"꼭 이야."
"알았다고."
"나 아는 사람 하나도 없으면 어떻해?"
"번잡하지 않고 좋지 뭐."
"하여간에 잔정 없기는……."

마치 언니를 떨어지기 싫어하는 동생모양 인경을 붙잡고 말을 늘어놓는 오랜 친구 현주.
고1 때 현주를 처음 만났다.
춘천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서울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에도 별로 걱정은 없었다. 그다지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주변인들에 대해서 무심했었다. 짝이 된 공주처럼 앳되고 귀여운 여자 애는 소품처럼 무신경했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춘곤증에 나른하게 몸이 풀리던 어느 날, 국사 선생님이 딸기 아빠가 되었다고 투덜거렸었다.
그때 불쑥 현주가 우리 집엔 딸이 셋이나 있는데, 라고 혀를 메롱 거렸다. 짝이 되고 두 달이 지나도록 사소한 잡담도 나누지 않았었는데, 그 순간 그 모습이 터무니없이 귀여워 우리 집은 경운기야. 라고 불쑥 고백하고 말았다.
늘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곤두세우던 인경이 그 날 만은 신기하게도 마음을 쉽게 열었다. 금기처럼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둔 아버지에 대한 말까지 불쑥 꺼낸 거 보면 현주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도 같았다.

"난 아무렇지도 않아. 자장면을 안 먹는 것만 빼고는."

말해놓고 나서 꽤나 건조하고 무심한 것 같아 내심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현주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인경을 돌아보았다.

"넌 무지 착하구나."

그 눈동자가 마치 강아지 같아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갈뻔 했었다.

"내가 연적지까지 바래다줄게."
"정말? 헤헤."

낯도 잘 가리고, 겁도 많은 성격이라 낯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게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닌가 보다.

"점심도 꼭 같이 먹어주기다."
"알았어."

하여간에 정말.
방실방실 웃는 현주의 모습에 인경도 기분 좋게 웃었다.

"맨날 이렇게 붙어 다녀서야 어디 연애나 하겠냐?"
"어머, 연애도 하려고?"

현주의 표정엔 설마 너가? 란 불신이 가득하다.

"사랑은 안 해도 연애는 할 수 있지. 연애가 별거냐? 까짓 꺼 화끈하게 한번 해보지 뭐."
"민폐다, 너."

현주가 못 믿겠다는 듯 손을 설레설레 저으며 웃었다. 인경은 괘씸하다는 듯 그런 현주를 턱을 세우고 바라보았다. 봄의 기운을 시샘하는 막바지 겨울 바람이 코끝을 빨갛게 얼리며 스쳐 지나갔다.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계단 강의실은 대학생이 된다는 마음으로 들뜬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삼삼오오 모여 설레는 마음을 주고받고 있었다.

강의실을 들어서는 인경은 안을 휘익 둘러보았다. 단대 별로 모이는 강의실에는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 듯 간혹 눈에 익은 여학생들이 보인다. 인경은 흥미 없는 듯 가까운 자리 아무 곳이나 털썩 주저앉았다. 입구에 들어서며 받아온 프린트 물을 뒤적거려보았다. 학교소개, 학과 소개, 교가 등 내용은 잡다하고 광범위했다.

'본 학과는 새로운 정보처리기술에 관련된 전문분야의 지식을 익히고 첨단 지식과 연구 방법을 사용하여 고도의 정보시대를 이끌어 나갈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 의 발전과 학문 발전에 공헌하는 인간을 양성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누가 썼는지 참 재미도 없게 써놨다.
어서 시작이나 했으면 하고 지루하게 몸을 틀려는데 뒷자리에 우르르 여학생들이 몰려와 앉았다.
다시 페이지를 쓰윽 넘겨보다 그나마 자신과 관련된 과 내용을 펴놓고 건성으로 읽기 시작했다.

'주요 연구분야로는 컴퓨터의 운영에 관하여 연구하는 운영체제, 컴퓨터 하드웨어 의 조직과 구성에 관한 컴퓨터 구조, 소프트웨어의 설계와 개발 및 유지 보수기법에 관한 소프트웨어 공학, 프로그래밍 언어의 설계와 구현에 관한 원리를 연구하는 컴 파일러, 수학적 모델에 대한 해를 구하고 수치적 해법에 대하여 연구하는 수치해석, 정보의 축적과 검색을 제공하는 정보시스템 구축을 연구하는 데이터베이스, 컴퓨터 에 지능을 갖도록 하여 추론하고 인식하게 하는 인공지능, 컴퓨터 통신과 네트워크 등이 있다.'

어수선한 주변 분위기 때문인지 글자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대로 튕겨 나가는 듯 하다.

"쟤 김 식 아냐?"
"누구?"
"왜에, 상원고 바람둥이."

뒷자리에서 여자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인경에게까지 들려왔다.
딱히 호기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읽고 있던 잡다한 글귀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심심하기도 해서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유학 간다고 들었는데, 우리학교 들어왔네."

여자의 말투엔 부러움과 비꼼이 모두 들어있다.
인경은 턱을 괴고 여자들이 쳐다보는 남자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남자를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입구 쪽에 서 있는 남자는 단번에 눈에 띠였다. 요란한 소문의 주인공이 됨직한 어딘가 노련한 냄새가 언뜻 맡아지는 것 같았다.

낡아서 무릎이 보일 정도로 헤어진 청바지 위로 새까만 트렌치 코트를 날리며 들어선 사내는 훌쩍 큰 키와 옷차림이 아주 잘 어울려 보였다. 이제 막 성인이 되는 남학생들과는 어딘가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 보였다.

"어디어디? 저 사람?"
"어, 저 바바리. "
"와아, 뽀대 난다. 저 바바리 진짜 버버리 아냐?"

마치 저승사자처럼 시커먼 바바리를 날리며 걸어 들어오는 남자를 향해 수군수군 말들이 한여름 뽀얀 먼지 일 듯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입구 쪽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는지 잠깐 멈춰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는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진짜 분위기 있게 생겼다."
"잘 생긴 건 아니래도 한 분위기 하지? 목매는 여자 애들이 한둘이 아니랜다. 남자 고등학교 앞에서 쪽팔린지도 모르고 기다리던 애들이 꽤 많았대. 애초부터 여자들 질척이는 거 싫다고 선을 딱 그어놓고 사귄댄다. "

망할 남자들이 오 백년 동안 여자들을 억압하고, 움츠리게 한 것도 모자라, 아직도 제 잘난 맛에 멋대로 세상을 휘두르고 사는 꼬락서니가 추잡스럽기 그지없다. 애초에 이 땅의 남자들만 자기 앞가림만 잘 했더라도 나라가 이 꼴은 아니었을거라는 생각에 입가가 일그러졌다.

"나도 들은 거 있는데, 쟤네 학교 영어선생하고도 소문 있었대. 재네 학교 영어선생하고 엄청났었대잖아. 나중에 영어선생 학교에서 짤리고, 젠 유학 갈 거라고 들었는데, 의외네."
"정말? 그 정도야?"

강의실 쪽으로 천천히 내려오는 남자의 모습을 뚫어져라고 쳐다보았다.
단지 여자 애들의 수다만 들었을 뿐인데 인경의 속에서 어쩐지 적의가 와글와글 끓어올랐다. 인경이 가장 싫어하는 남자의 전형은 모두 갖춘 남자.

"재수 없어."

속으로만 생각한다고 했는데, 저절로 목소리가 낮게 튀어 나왔다.

흘깃.
스쳐 지나가는 남자가 인경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잠깐동안 시선이 부딪혔다.
인경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최대한 경멸을 담아 시선을 되돌려 주었다.
의외다 싶은지 남자의 입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그리곤 진행 방향을 돌려 인경 쪽으로 성큼 걸어왔다.

"어머, 이쪽으로 와."
"어떡해? 들었나봐."

한껏 목소리를 낮춘 뒷자리 여학생들의 속삭이는 들었는지 한쪽 입가를 말며 씨익 웃기까지 한다.
자신감, 과다증세 중증이다. 하여간에 사내들이란, 어쩜 하나 같이 저 모양인지.

누가, 겁낼 줄 알고?
인경은 턱을 치켜들었다.

"자리 없지?"

마치 당연히 빈자리 일거라는 확신이 어린 어투로 물었다.
그리곤 인경이 대답도 하기 전에 몸을 낮춰 인경의 옆자리에 앉았다. 좁다란 계단 강의실의 의자에 남자의 몸이 꽉 끼는 듯 존재감이 훅하니 끼쳐왔다.

역시 하는 짓거리도 재수 없다.
인경이 낮게 이마를 찌푸렸다.

대한민국에서 자란 사내의 전형적인 행동이다.
저 밖에 모르고, 저 잘난 맛에 사는……. 저런 놈들 덕분에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사는 일은 그다지 행복한 일은 아니다. 아니, 꽤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가 더 많다. 그깟 국방의 의무 하나 하는 것 가지고도 유세는 얼마나 유세란 말인가?
아침부터 재수 없는 꿈을 꾸더니, 연속 재수 꽝이다.

뭐라, 대꾸할까 생각하던 인경은 고개를 팽하니 돌려 외면했다.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무슨 과야?"

마치 쿡하고 옆구리를 찌르는 듯 남자가 말을 걸었다.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하며 인경이 기막힌 듯 남자를 훑어보았다.

"염병하네."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내색을 드러냈건만 남자는 씩씩하게 웃기까지 한다.
의외로 성격이 좋다.

"그냥 인사나 하자고. 난 전자컴퓨터."

하필 재수 없게도 같은 과다.
앞으로 골치 아프게 엮일 것 같은 기분에 인경은 쓰게 웃었다.

"김 식."

어깨를 세우며 당돌하게 악수를 청하며 손까지 내민다.
인경은 눈을 꿈뻑했다.

남자의 손을 어처구니없이 내려다보았다 다시 시선을 들어 남자의 눈을 쳐다보았다.
입가는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은 남자.
그제야 무언가 번개처럼 머릿속을 내달았다.
인경에게 하는 인사가 아니었다. 뒷자리에서 그들의 대화를 귀를 세워 듣고 있는 여자들에게 일부러 들려주기 위해 하는 노골적인 말이었다. 어쩌면 인경의 목소리를 듣기 전에 여자들의 수다를 먼저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경이 알아챈 것을 알았는지 살짝 눈꼬리가 쳐지며 반원을 그린다. 눈 안에 일부러 꾸민 웃음이 들어있다.
요란한 소문의 주인공답게 만만한 놈은 아닌 것 같다.
성격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은 취소다. 비틀린 녀석.

"웬만하면 딴 데 가서 놀아라."

인경은 재수 없다는 듯 손등을 훠이 훠이 새를 쫓듯 손짓을 했다.

"수줍어 하기는……."
"하!"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숨구멍이 막힌 것처럼 입이 반치는 뚝 떨어졌다.
남자는 기막혀 입을 벌린 인경을 보며 노련하게 웃었다.
입학식을 3일 앞 둔 봄의 길목에서 인경은 뻔뻔하고 성격도 비틀리고 저 밖에 모르는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놈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