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풍성한 봄 햇살이 마당위로 쏟아졌다. 담벼락 아래 작은 꽃들이 방울방울 피어났다.
“적당히 싸.”
엄마는 아침부터 들뜬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엉덩이를 실룩실룩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집에 있는 모든 찬합을 꺼내와 불고기를 넣고, 과일도 깎아 놓고 겉절이 김치에 몇 가지 전도 부쳐 놓았다.
“거기도 사람 사는 덴데 굶겼겠냐고.”
“모자란 것보다 남는 게 나아. 한창 땐데 짬밥이라 얼마나 배가 고프겠니? ”
찌푸리고 선 나를 향해 엄마가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큰 애들이 셋이나 된다며? 밥이 모자르면 어쩌나아.”
엄마는 리듬을 넣어 마치 민요를 부르듯이 말했다.
“어디 보자아. 수저도 됐고, 뭐가 더 필요할라나.”
마루에 나와 앉은 할머니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힐금힐금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참견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마루에 걸터앉아 평상 가까이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아들은 봄날 소풍 가는 아이마냥 들뜬 표정을 하고 엄마와 나를 보고 있었다.
“딱 고만해. 안 모잘라.‘
나는 신이 난 엄마를 향해 딱 잘라 말했다.
“진우가 원주통닭이랑 왕짱구네 만두도 사서 온다고 했어. 현기도 가게에서 과자랑 음료수 챙기고 있고.”
“그럴까? 근데 넌 거기 간지러? 아까부터 왜 거기 긁고 있어?”
“…응?”
머리를 편 엄마가 나를 바로 보고 말했다. 엄마의 눈짓에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먹을 꼭 쥐고 왼쪽 가슴을 지긋이 문지르고 있었다. 엄마가 알려주기 전엔 의식하지 못했다. 빠르게 손을 내렸다.
“요기까지만 싸.”
“운이 좋다. 사창리로 왔다니… . 내가 챙길 수 있어서 참 좋다.”
엄마가 또 벙실벙실 웃는다. 설 명절 앞에 김식이 오지 않자 엄마가 넌지시 내게 물었다. 군대에 갔다고 말해주니 서운한 얼굴을 했던 엄마였다. 이기자부대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면회라고 갈 기세였다.
그득그득 담아놓은 음식을 보자기에 야무지게 꼭곡 묶었다. 보자기 세 개가 평상위에 놓였다.
“막냉이 면회 간다며? 에고…험난한 고무신을 하는구나. ‘
나른한 늦잠을 자고 난 도청 언니가 화장실을 가다 나를 놀렸다. 엄마가 또 벙실벙실 웃었다. 마루 끝에 앉은 아버지의 아들도 엄마를 보고 따라 웃었다.
“대장.”
열린 대문 안으로 진우와 현기가 들어왔다.
“형.”
이제껏 어떤 말도 붙이지 못하고 구경만 하던 아버지의 아들이 진우를 보고 벌떡 일어섰다.
“오냐. 잘 있었냐?”
대학생이 된 진우가 짐짓 점잖은 체를 하며 아버지의 아들의 목을 팔로 감아 걸며 장난을 걸었다. 정신연령이 같은 두 사람의 낄낄 거리는 웃음이 마당위로 터져나왔다.
“너 고새 또 컸다.”
“진짜? ”
아버지의 아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마루에 앉은 할머니는 뭐가 좋은지 덩달아 웃었다. 그저 아들 손자는 웃기만 해도 이쁜 모양이었다.
“너네들은 이따 저녁에 해 줄테니 적당히 먹어. 군 생활 하는 애들 많이 먹이고.”
“네에엡.”
진우가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보자기 하나를 들었다. 현기가 보자기 두 개를 들기전에 엄마가 하나를 뺏어 들었다. 나는 준비했던 가방만 챙겨들었다. 우르르 대문을 나서자 마당에 내려 선 아버지의 아들이 발길을 정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승효도 같이 가면 안 돼? 자리도 남잖아.”
진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대문을 넘기 직전에 걸음이 딱 멈췄다. 현기가 내 눈치를 살폈다. 마루에 앉은 할머니도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침 내내 흥이 올라있던 엄마도 가만히 내 표정을 살폈다.
“어머니, 그래도 되죠?”
“아이쿠야, 내가 그 생각을 못했네.”
마당 가운데에서 강아지처럼 끼잉끼잉 하며 아버지의 아들이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아무 말도 못들은 척, 못 본 척 하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승효야 가자.”
현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아들이 신이 나서 대문가로 내달려왔다.
“에고 넘어질라, 조심해라.”
마루에 앉아있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버지의 아들보다 먼저 내게 닿았다. 고개를 냉정히 돌리고 먼저 대문을 나섰다.
“형아들 말 잘 듣고.”
“네에.”
봄 햇살 아래 엄마는 아버지의 아들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뛰어오느라 날린 머리카락도 정리해주고 보드라운 뺨도 한번 문질렀다. 어리고 이쁜 것은 쉽게 사랑을 받았다. 그 모습을 보다 시선을 돌려버렸다. 뭐가 이쁘다고.
골목 밖에 현기가 끌고 온 차가 있었다. 진우가 보자기에 싼 도시락 하나를 아버지의 아들에게 안기며 빠르게 뒷 자석으로 밀어 넣었다. 혹시라도 내가 삐딱하게 변할까 조심스럽고 급한 몸짓이었다.
나는 다시 안 보이는 척 조수석에 앉았다.
“현기는 운전 조심해라. 진우는 너무 까불지 말고.”
“그럼요, 그럼요.”
“먼데도 아닌데 걱정은…갔다 올게.‘
“어이야. ”
현기가 운전석에 앉자 창문을 내리고 엄마를 향해 말했다. 엄마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마치 잘했다 라고 하는 것 같았다. 뒷자석에 앉은 아버지의 아들과 현기가 백미러 거울을 통해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차 안에 고소한 튀긴 닭 냄새가 진동했다.
세 사람의 이름을 면회신청서에 적었다.
진우가 주기도 이름을 적고 현기가 한 장우 이름을 적고 나는 김식의 이름을 적어냈다.
각자 양손에 음식을 들고 면회소 안으로 들어섰다. 면회소 안은 신경을 쓴 티가 역력히 났다. 널직한 공간에 놓인 벽면에 붙여놓은 부대마크까지. 나름 낡음을 감추려 정성을 쏟은 것 같았다. 이미 몇 개의 테이블은 가족단위들이 있었다. 우리 일행이 안으로 들어서자 잠깐 시선이 몰렸다. 사내 모양 셋에 중학생 아이까지 우리는 이상한 조합이었다.
다섯 달 만에 김식을 만난다.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막상 신청서에 김식 이름을 적고 나자 입이 말라왔다. 비어있는 자리를 잡아 음식물을 내려놓고 창밖을 살폈다.
기분이 이상했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져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더디게 시간이 간다고 생각한 순간 면회소 안으로 군복을 갖춰 입은 세 명이 들어왔다. 누구보다 훌쩍 큰 키의 김식과 악마 같이 잘생긴 주기도와 허리가 곧은 한 장우가 발 맞춰 안으로 들어왔다.
진우가 와아 하면서 입을 벌렸다. 옆에 선 아버지의 아들도 똑같이 세 명을 보고 입을 벌렸다. 옆쪽 테이블의 시선도 세 사람에게 몰렸다.
나는 한사람만 보았다.
낯선 옷에 낯선 모자 낯선 장소에서 익숙한 눈을 쳐다보았다.
익숙한 눈이 웃었다, 나를 보고.
나도 웃은 것 같다. 어색하게. 나 많이 보고 싶었나보다.
군화를 신은 발이 우리와 가까워졌다.
현기는 점잖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고 진우는 호들갑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의 아들은 진우 옆에 서서 김식을 보고 수줍게 웃었다.
나는…?
내 표정은 모르겠다.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그냥 그런 기분일줄 알았다.
그런데 각진 군복을 차려입고 모자를 눌러 쓴 얼굴을 보자 어쩐지 입가가 풀어졌다. 내 표정이 신경 쓰여 빠르게 손으로 입 꼬리를 내렸다. 다시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김식의 입 꼬리도 웃고 있다.
“뭐야? 면회를 오려면 여장을 하고 왔어야지. ”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대뜸 주기도가 말했다. 김식만 보던 내 시선이 주기도에게 옮겨갔다.
“이쁜 여동생이라도 와야 군 생활이 편해질까 말까 한데… 애새끼들만 데려왔어? ”
세 사람이 우리 앞에 섰다.
마지막 술집에서 양주를 나눠 마셨던 날이 어제같은 생생한 얼굴을 한 세 사람을 만났다.
“미친…. 그렇게 아쉬우면 서경후 데려다 여장시키던지.”
주기도의 거센 말에 나도 응수했다.
“할튼 센스 없어.”
“이 미친 애가 주기도.”
내 옆에 현기와 진우, 아버지의 아들이 꾸벅 인사를 했다.
“겁나 잘생겼어요. 혀엉.”
진우의 표정이 김식의 오토바이를 처음 본 날 같았다. 충성을 맹세할 처럼 주기도를 보는 눈빛이 격렬했다.
곧게 선 한장우의 눈을 보며 작게 끄덕 인사했다.
“여기는 한 장우. 그리고 이쪽은 내 쫄병들.”
허리를 곧게 편 한 장우를 향해 또 세 사람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잠깐 미뤄두었던 김식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익숙한 눈높이를 바로 찾아냈다. 반짝이는 김식의 눈과 다시 마주쳤다.
“안녕.”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김식은 내게 인사대신 내 손을 잡았다.
마치 내꺼다 선언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어색하게 서 있었다.
순간 우리 일행이 침묵했다. 모두의 눈이 김식이 맞잡은 내 손을 확인했다.
뭔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진우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고 현기는 빠르게 우리 앞쪽으로 한발 내딛어 시선을 가렸다. 한 장우가 멀뚱 서 있던 아버지의 아들을 끌어당겨 시선을 돌렸다. 주기도는 한껏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미성년자 앞에 두고 꼴 뵈기 싫게 뭔 짓거리야? 빨리 자리에 앉자.”
김식이 나를 내려다보며 키득 웃었다.
“제법 군복이 어울린다, 나도 군복 입은 적 있는데.…”
“너가 무슨 군복 ? ”
“나는 별 세 개를 달았는데, 너 한참 멀었다.”
작대기 두 개가 달린 가슴을 잠깐 보았다. 맞잡은 손바닥이 간지러워 그렇게 물었다.
“그냥 같이 입대할걸 그랬나?”
낯선 옷을 입고 있어도 김식이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빨리 와서 앉아. 음식 식는다.”
주기도가 다시 소리를 빽 질렀다.
엄마가 싸준 음식이 푸짐하게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차곡차곡 쌓여있던 찬합이 한 단씩 한 단씩 내려앉았다. 진우가 사온 원주통닭도 테이블위에 올라왔다. 그 옆에 춘천에서 유명한 왕짱구 만두도 펼쳐졌다.
한쪽은 군복을 입은 세 사람, 맞은편엔 우리 일행이 앉았다. 마치 처음 미팅에 나선 초보들처럼 어색하게 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