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몇 달 만에 내려간 집은 변해 있었다.

 

빚 바랜 초록 대문에서 좀 더 커다랗고 위풍당당한 갈색 대문으로 바뀌어 있었다. 조심스레 문을 밀어 보았다. 다행히 문이 열려 낯선 마음으로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치 못하게 변해 버린 집을 보고 나는 잠시 서 있었다.

 

나의 유년기가 새겨져 있던 집은 우리 모두가 떠나있던 시간 동안 나이가 들어 버렸다. 엄마와 전화 통화 때는 조금 수리를 한다 했는데 집은 꽤 변해 있었다. 기본 틀은 유지하고 있지만 생활하기 편하게 한옥과 양옥의 중간의 구조가 되었다.

 

일단 안방과 우리 방으로 연결되던 큰 마루를 둘러싸고 튼튼한 유리문이 생겨났다. 그 유리문이 단단히 문단속이 되어 있어 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활짝 열려진 채로 살았던 집에 낯선 열쇠를 보자 잠시 막막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

 

 

마당 가운데 새롭게 만들어진 평상위로 그늘막이 생겼다. 어릴 적 아버지가 만들었던 평상은 이미 없다. 하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지난 겨울엔 이 집을 다시 찾았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엄마가 신경 써서 집을 고쳤겠지만 밝은 햇볕아래 드러난 집은 낡음이 구석구석에 잘 숨어 있었다.

 

평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낯설고 익숙한 기분으로 평상에 앉았다.

변한 것은 집만이 아니였다.

그늘막에서 가만히 마당을 쳐다보자 틀린 그림 찾기처럼 예전 기억과 변한 곳이 속속히 보였다.

담장을 따라 있던 이쁜 정원에도 마당과 정원을 구분 짓는 작은 벽돌로 만든 경계선이 생겼다. 예전에 계절마다 풍성하던 화단과 간단한 먹거리를 심던 텃밭도 많이 작아지고 초라해져 있었다. 돌보는 주인이 사라진 사이 풍성하던 정원도 많이 망가져 있었다.

마당도 변했다.

얇고 납작한 돌들을 바닥에 깔아 비 오는 날에 진흙길을 걸을 일이 사라졌다. 평상 옆에 서경 언니가 나를 씻기던 수돗가도 새로 바른 시멘트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할 일이 없어져 평상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그늘막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어릴 적 내가 자란 집이지만 낯설고 익숙했다. 뭔가 서운한 것 같기도 하고 개운한 것 같기도 했다.

 

“막내야, 언제 왔어?”

반쯤 열린 대문으로 엄마가 양손에 잔뜩 장을 본 짐 꾸러미를 들고 들어왔다. 토끼 닮은 구름을 찾아보다 벌떡 일어섰다. 엄마의 얼굴은 한 여름 물 뿌려놓은 마당처럼 생기가 있었다.

부스럭 거리며 평상에 짐을 내려 놓은 엄마가 내 옆에 바짝 다가와 앉았다.

 

“손!”

 

강아지 훈련하듯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오른 손을 들어 반짝반짝 흔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았다가 하나하나 다시 펴보였다.

 

“다 나았어. 괜찮아.”

 

엄마는 은근슬쩍 내 오른손을 끌어다 엄마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너 쫄병 현기가 너 오면 바로 과외 시작해 달라더라.”

 

그리고 내 손바닥을 살살 쓸어내렸다. 마지막 헤어질 때 내 살을 뚫고 지나가던 바늘이 못내 걸려했었다.

 

“너 언제 오냐고 내내 목빼고 기다리지 뭐니. 언제 적 쫄병인데 아직도 대장이라고 하더라.”

 

어린 시절 동네 골목대장 할 때 내가 떠올랐다. 지금 보다 더 짧은 스포츠 머리를 하고 남자아이들의 대장을 하고 다니면 진짜 남자가 되는 줄 알았던 시간이 있었다.

 

“손은 괜찮아.”

“근데, 왜 이렇게 말랐어? ”

 

마디마디 거칠어진 손으로 이번엔 내 뺨을 쓸어내렸다. 엄마는 반팔 아래 드러난 내 팔목을, 내 팔뚝을 관찰했다. 어린 시절 일찍 서경언니를 따라 도시로 내보낸 게 늘 안타까운 엄마였다.

 

“서경이 없는 게 티 나내. 티 나. 얼른 닭부터 고아야겠다. ”

 

엄마가 마루를 막아놓은 유리문에 걸려있던 열쇠를 열었다. 그리곤 유리문을 활짝 열어 한쪽으로 밀었다. 넓고 시원한 예전의 마루가 나타났다.

 

“들어가자.”

 

마루는 유리문 덕분에 근사한 거실로 변해있었다. 마루 한가운데에 커다란 돗자리를 깔아놓고 나무로 된 테이블을 놓았다. 묵직한 나무로 만든 테이블은 한눈에 봐도 신경 쓴 티가 났다.

마루 한쪽에 커다란 냉장고가, 다른 한쪽엔 내 눈에 익숙한 엄마의 가구가 놓여 있었다. 비로소 집에 돌아온 기분이 생겼다.

 

“앞쪽 방에 서경이 짐 들여놨어. 그 방 써.”

 

안방과 마주보는 그 방은 예전에 할머니가 쓰던 방이라 멈칫했다.

 

“너네 쓰던 방 세 주었어. 뒤로 화장실 하나 새로 들여서.”

 

예전 언니들과 나눠쓰던 방이 있는 쪽이 좀 더 길어졌다 했더니 그곳에 새로운 화장실이 들어섰다.

 

“완전 큰 공사 했네.”

“주서방이 많이 도왔어. 저 평상도 그렇고. 이 테이블도 그렇고. 아주 꼼꼼하게 잘 봐주더라.“

 

큰 형부가 공사 내내 열심히 챙겼다며 엄마가 칭찬을 했다. 누구에게나 칭찬이 후한 엄마지만 마당의 평상과 테이블은 차고 넘친 칭찬을 받을 만 하다고 생각했다.

애들 다 떠나고 혼자 살기엔 너무 넓은 집이라고, 세라도 주면 내 서울살이 비용도 나올 거라는 말을 슬며시 했다. 도청에 발령받은 공무원이라며 착하고 성실하다며 엄마는 칭찬을 했다.

 

“모처럼 사람들이 복작되니깐 나도 좋다.”

 

말하는 내내 엄마는 계속 움직였다.

마당의 수돗가에서 생닭을 척척 씻어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수돗물에 알몸을 한 닭이 철푸덕 철푸덕 목욕을 했다.

 

“이렇게 많이 삶아?”

“그럼 사람이 몇인데, 도청 식구들도 같이 먹어야지. ”

 

수돗가 가깝게 걸어놓은 솥단지에 엄나무와 마늘과 생닭 여러 마리를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아직 기울어지지 않은 볕이 따가운데도 목에 수건 하나 두르고 엄마는 내내 불도 피우며 즐겁게 왔다 갔다 했다.

 

“세상 모든 엄마들은 내 새끼 이쁘다는 사람하고, 내 새끼 입에 밥 넣어주는 사람이 제일 고맙지. 내가 이렇게 넘의 딸을 거두면 혹시 아니? 남도 내 딸을 거두어 줄지.”

“그런 말이 어딨어?”

엄마의 얼굴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도 신이 난 표정이었다.

 

“그냥 내 딸이 멀리 있으니 급한 대로 나는 나대로 뭔가 해야 싶어서. 내가 먹일 수 없으니 누구라도 챙겨줬으면 하는 생각이지. 보통 내 입에 뭔가 넣어주는 사람은 사기꾼 아니면 엄마 밖에 더 있냐? 사기꾼도 아니고 엄마도 아닌데 누구든 내 입에 공짜로 밥 넣어주는 사람은 무조건 좋은 사람이지. ”

그런가?

평상위에 앉아 엄마가 깍아 준 참외를 오물거리며 반찬을 갖다 날아주던 현주를 떠올렸다. 좋은 사람이지. 삼겹살을 구워 주던 김식도 잠깐 생각났다. 사기꾼은 아니지.

잠시도 쉬지 않고 사브작사브작 움직이더니 마당 안에 음식 냄새가 가득찼다

이제 만족 했는지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나는 참외 하나를 엄마 입에 넣어주고는 엄마 목에 걸린 수건으로 엄마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을 콕콕 닦아 주었다.

 

“언니들도 엄마 이렇게 땀 흘리며 남 밥 해주는 거 알면 좋아하지 않을걸.”

“지들이 안 좋아하면 어쩔건데, 연락도 자주 안하면서. 그냥 내가 좋으면 하는 거지 뭐.”

 

해가 기울어져 마당에 긴 그림자가 생겼을 때 낯선 사람들 세 명이 대문을 넘어왔다. 제각각 성격을 알 수 있는 옷차림의 세 명은 서경언니 또래 같아 보였다.

 

“다녀왔습니다.”

한톤 높은 기운 찬 목소리. 경쾌한 짧은 단발 펌을 한 그 사람은 마치 말괄량이 둘째 언니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예의바른 정직한 톤의 단아한 묶음 머리를 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큰언니 같았다.

 

“이 좋은 냄새는 뭔가요? 어머님.”

 

짧은 단발펌의 주인공은 엄마를 부르는 호칭이 너무나 익숙했다. 생글생글 웃으며 넉살좋게 인사하는 모습에 엄마가 기분 좋게 웃었다.

 

“저쪽 길에서부터 어느 집에서 이리 맛있는 냄새가 나나 했네요.”

“저도요, 어머님. 벌써 배고파요.”

 

갑자기 들이닥친 제각기 다른 세 사람으로 마당이 꽉 찬 듯 느껴졌다.

나는 스르르 일어서 꾸벅 인사를 했다.

평상 위에 서 있는 나를 보는 그 사람들의 고개가 한참 위로 위로 어? 어어? 하며 올라오다 뒤로 젖혀졌다.

 

“어머, 근데 이 잘생긴 미 소년은 누구일까요?”

 

대문을 넘어오던 세 사람 중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거리낌 없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심부름 오셨나? ”

적극적인 호기심으로 눈빛이 반짝거렸다. 나는 엄마와 시선을 마주쳤다. 엄마는 그냥 웃기만 하셨다.

 

“우리 막내.”

엄마의 대답에 또 한 사람이 바짝 평상으로 다가왔다.

 

“아니, 이런 이쁜 아들을 숨겨 놓으셨다니요? ”

“세상에! 어머니는 밥 안 드셔도 배 부르시겠네요. ”

“학생? 몇 살이에요?”

 

조용하던 마당이 마당놀이 한판 벌어진 듯 시끄러워졌다.

 

“이런 안소니 같은 아들이 있는 줄 알았다면 다들 이 집 들어오려고 했을거에요.”

“뭔 소리야? 안쏘닌가는 뭐고? 딸이야, 딸.”

 

엄마가 큰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의 명쾌한 딸이란 말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어머어머 아드님인줄 알았어요. ”

“나도, 나도. ”

 

단발머리가 바로 신발을 벗더니 평상으로 올라와 내 옆에 바로 서 버렸다.

 

“와, 키 봐.”

 

발 뒷굼치를 들어 나와 키를 재려 했다.

그 모습을 보고는 큰 언니를 닮은 머리를 묶은 사람도 평상위로 올라와 나와 키를 대 보았다. 양 옆에 나란히 서 부산을 떠는 사이 마지막 한 사람이 평상 옆으로 다가왔다.

 

“키가… 얼마?“

 

마지막으로 한발 느릿 걸음으로 긴 생머리 새침떼기 같은 여자도 평상으로 다가왔다. 딱 떨어지는 말투로 물었다. 어쩐지 느낌이 서경언니 같았다. 모두가 진짜 내 키가 궁금한지 갑자기 조용해졌다.

 

“칠십 조금? 그 이후로는 정확히는 안 쟀어요.”

어릴 때부터 성장이 빨랐다.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싶어서, 빨리 키가 크고 싶어서 우유도 먹고 운동도 해서 그런지 몰라도 어릴 적부터 훌쩍훌쩍 키가 자랐다. 여고에서도 나와 키가 비슷한 사람은 학교 운동부 밖에 없어 이런 반응은 익숙했다.

 

“몇살이에요?”

 

엄마를 쳐다보았다. 대신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직접 대답을 해야 할 모양이었다.

 

“스무살, 올해 대학 들어갔어요.”

“한창 이쁠 나이네.”

”그냥 우리 동생 하면 되겠네.“

 

잠깐 조용하던 집안이 시끄러워졌다.

 

“남자친구 있어요?”

“이제 일학년이라는데 뭐… 급할 거 있나?”

 

까르르 웃음소리와 함께 요란하고 소란한 말들이 마구 쏟아졌다. 평상에 올라온 사람들은 거침없이 내 팔 다리도 주물럭 거릴 기세였다.

 

“와아~ 부럽네. 나중에 내 남친 인척 한번 해줘요. ”

“부럽기는 삐쩍 말라가지고는. 고만하고 밥 먹자. 다들 많이 먹고 너는 살 찌고, 그쪽은 더 커.”

“키는 글렀고, 가슴이나 커야겠네요.”

 

또다시 와하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엄마는 딸들이 모두 떠난 이 집에 새로운 식구들을 들였다. 마치 떠난 언니들을 닮은 것 같은 세 사람 덕분에 오래 전 나 어릴 적 언니들과 복닥거리던 그때처럼 집안에 활기가 들어찼다.

 

저녁 밥상이 차려졌다. 엄마의 김치와 마당 볕 아래 끓인 통통한 닭이 그득 그득 그릇에 담겨 앞에 놓였다.

 

“막내. 많이 먹어요. 팔이 부러지겠어.”

“막내 덕분에 우리도 잘 먹을께요.”

“잘 먹겠습니다.”

 

성격을 닮은 인사가 밥상 앞에 쏟아졌다. 어느새 엄마처럼 나를 막내라고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 앉았다.

일곱이 복작거리던 옛 집에 둘만 남았다. 대신 낯선 세 사람이 들어왔다. 얼핏 보면 예전의 딸 넷을 가진 어느 날의 저녁 밥상처럼 뜨거운 불앞에 앉아 푹 고운 닭을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엄마가 왜 새로운 사람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엄마도 나도 예전의 그 시간이 많이 그리웠나보다.

 

저녁상을 치우고 엄마랑 나란히 안방에 자리를 폈다. 나는 할머니가 지냈던 건넌방에 들어가기 싫었고 엄마는 오랜만에 만난 나를 곁에 끼고 싶어했다. 볕에 잘 말린 까슬까슬한 이불을 덮고 눕자 몸이 나른나른 편해졌다.

 

머리맡에 엄마가 카세트라디오를 가져와 음악을 작게 틀었다.

 

“서경이 짐에서 찾았는데 저 방 직원들이 노래 녹음해 줬어.”

 

엄마는 새로운 취미를 찾았다. 낡은 서경언니 카세트 라이오에서 이상한 노래가 나왔다.

 

[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이 마음

 

사랑은 가고 친구도 가고 모두 다

 

왜 가야만 하니 왜 가야만 하니 왜 가니

 

수많은 시절 아름다운 시절 잊었니

 

떠나보면 알거야 아마 알거야

떠나보면 알거야 아마 알거야 ]

 

 

“노래가 이상해.”

“생긴 것도 이상해.”

엄마가 내 말투를 흉내내어 대답했다.

 

“근데 들으면 좋아. ”

 

작게 틀어놓은 노래 소리 사이로 엄마가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는 다시 내 오른손을 만지작거렸다.

 

“다시는 그러지 마.”

“알았어.”

“그래, 그래야지.”

 

가수가 떠나보면 알거야 하면서 처량하게 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왜 이 노래가 좋은걸까? 울고 싶어라 부분이 좋은 걸까? 떠나보면 알꺼야가 좋은 걸까? 생긴 것도 이상한 가수가 부르는 이상한 노래의 어느 부분이 좋은걸까? 문득 생각했다.

 

“딴 애들처럼 미팅인가 뭔가도 해보고 그래.”

“알았어.”

“딴 애들처럼 놀고 싶을 땐 놀아도 돼. 엄마가 아직 학비 댈 힘은 있어.”

“알았어.”

“딴 애들처럼 예쁘게 머리도 기르고.”

“알았어. ”

“딴 애들처럼 남자친구도 만들어보고”

“알았다고.”

“딴 애들처럼…”

“알았어, 다 해볼게.”

 

언젠가 아버지의 목말을 타고 네에 네에 염소소리를 냈을 때 처럼 나는 알았어 라고 대답했다.

어느새 엄마는 잠이 들었고 나는 오랜만에 서울 작은 방에서 내내 가지고 있던 긴장감을 내려놓았다. 열어놓은 미닫이문으로 마루로 밀고 들어온 달빛이 환했다.

집 안을 채운 사람이 위안이 되는 밤이었다.

 

오전에 도청 근처 불교유치원 점심 준비를 해야 한다며 엄마는 일을 나갔다. 도청 직원들도 출근고 나는 한가롭게 볕 아래 뒤척였다. 오후엔 예전 골목대장 시절 부하였던 현기 공부를 봐주러 나갔다 오는 게 내 일과였다.

 

늦은 오후에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양손 가득 먹거리 장을 봐서 들어왔다.

과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간식거리로 삶은 옥수수거나 삶은 감자거나 감자전이거나 혹은 또 비빔국수를 해주었다. 나를 통통한 돼지로 만드는 게 엄마의 목표인 것 같았다.

난 그저 납작납작 받아먹었다. 햇살은 풍성했고 나는 한껏 게을렀다.

 

 

그리고 밤이 되면 도청 언니들하고 마루에 나란히 누워 오이를 얇게 저며 오이 마사지도 하고, 영양크림 맛사지도 해보았다 짖궂은 언니들이 앞머리에 삔을 찔러놓고 내 얼굴에 화장을 해주기도 했다.

 

엄마도 노래를 틀어놓고 넷이 나란히 누워 뒹구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 보았다. 만약 내 사춘기 시절이 이 집에 있었다면 언니들과 이런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아마, 그런 흐뭇함이지 않았을까?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매미가 극악스럽게 울었다.

입추도 말복도 지나 팔월의 극성스러운 더위도 조금 사그라졌고 길가 가로수에 바람이 내려 앉아 작은 파도를 만들었다. 가로수 아래로 키 작은 코스모스도 제법 눈에 들어왔다. 공기에서 가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내 부하를 자처하던 현기는 부쩍 자라 있었다. 지난 겨울 만났을 때는 나보다 조금 작더니 그새 내 키를 넘어섰다. 한 여름 풀 자라듯이 쑥쑥 크고 있는 것 같았다.

내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과외를 부탁해왔다. 어린 나에게 얻어 맞고 돌아온 어린 현기 때문에 속이 상했던 현기네 어머니는 현기의 변화에 친절해 지셨다. 아직도 나를 대장이라고 부르는 호칭은 영 탐탁치 않은 것 같았지만.

 

“대장아, 이거 가져가라.”

 

이층 살림집에서 내려오자마자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검은 봉다리를 내밀었다. 파랗게 익은 사과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너 덕분에 내가 요즘 살맛이 난다.”

 

이 동네에서 오래된 슈퍼를 운영하는 현기 어머니는 제법 통통한 봉투를 주셨다.

 

“너네집 자매들은 참 똑똑하다. 니네 엄마는 밥 안 먹어도 배부르지. 이렇게 똑똑한데 니 할머니는… ”

 

쯧쯧 혀를 차며 돌아섰다. 저 말의 뒷말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모른 체 하며 아이스크림 냉장고에서 아이스바와 쭈쭈바를 골랐다. 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올 도청 언니들과 엄마가 좋아하는 취향대로 골랐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아이스바 다섯 개를 담고 하나는 먹으면서 집을 향해 쭐래 쭈래 걸었다. 현기네 어머니가 담아주신 아오리 사과도 덜렁 덜렁 흔들렸다. 앞머리가 내려와 핀으로 찔렀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엄마의 이상한 노래를 흥얼거렸다.

 

[울고 싶어라 울고 싶 어라 이마음. ]

 

이상한 노래는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가수 같지 않게 부르는 한숨같은 노래 같아서 좋았다. 또 중간 중간 숨을 쉬었다 다음 마디를 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멀리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절로 고개가 소리를 따라 돌아갔다. 키 작고 조그만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참 나.”

 

잠깐 사이에 오토바이 소리가 귀에 익었나 보다.

현기네 마트에서 집까지 고작 삼백미터 길을 걸어가면서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거렸다. 가끔씩 오토바이 소리가 들릴때마다 긴장하는 내가 웃겼다.

매미소리와 내 이상한 노래 소리와 시원한 바람과 손에 든 아이스크림 하나가 더 없이 한가한 날이었다.

 

큰 길가에서 집 쪽 골목으로 들어가는 길 앞에서 낯익은 것을 발견했다.

 

“스즈키다.”

 

까맣게 잘 빠진 익숙한 오토바이, 그늘 아래 잘 세워진 까만 오토바이는 김식의 것과 닮았다. 하마터면 예전 꼬마 삼총사들처럼 안녕 스즈키야 할 뻔 했다.

 

여기에 있을 리가, 스쳐 지나려다 다시 오토바이를 쳐다보았다.

운전석에 걸어놓은 까만 헬멧이 낯이 익다. 아니… 진짜 그 스즈키가 맞는 것 같다.

 

“별….”

 

세상에 스즈키가 한 대인가? 똑같은 헬멧이 하나인가? 막 지나려 할 때 길 건너 작은 구멍가게에서 막 나오는 까만 옷을 입은 김식과 딱 눈이 마주쳤다.

 

“깜짝이야. 너… ?”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섰다. 놀란 눈을 한 나와 삐딱하게 서 있는 김식과.

김식이 나를 훑어 보았다.

게으른 슬리퍼와 반바지 그리고 한손엔 까만 봉다리와 다른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하.”

 

어처구니가 없는 듯 입을 비틀어 웃었다. 성큼성큼 길을 건너 나에게로 다가왔다.

 

“아주 좋은가보다.”

"여긴 왜?“

 

오토바이를 뒤에 두고 나란히 마주 섰다. 나무 그늘아래 함께 서서 잠시 쳐다만 보고 섰다. 서울 어느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익숙했다.

“아니…어떻게?”

 

아니 질문이 멍청했다.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왔겠지.

까만 봉다리 안에 든 아이스바 하나를 봉지에서 꺼내 내밀었다.

김식은 나를 빤히 건네다 보았다.

 

“싫어?”

“씨 …그게 어떤 꼴로 보이는지도 모르면서?”

“딴 거 줄까?”

“내놔.”

 

또 뭔가 비틀렸다. 눈매가 뾰족해지더니 내가 내민 아이스바를 받았다. 그리고 그늘 아래 철푸덕 앉았다. 나도 그 옆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김식은 세 번만에 아이스크림을 먹어 치웠다. 받기 싫어하더니 ….

그리고 남은 쭈쭈바 먹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왜? 더 먹고 싶은 건가? 마지막 남은 거까지 다 먹을때까지 김식은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아니,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하나 더 줘? 도청 언니들꺼긴 한데.”

“도청 언니들은 또 뭐야?”

“엄마가 데려온 언니들.”

“너 … 진짜 재밌나보다.”

“뭐 그럭저럭. ”

 

살랑살랑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나는 점점 기분이 좋아지는데 김식은 기분이 별로 인 것 같았다.

 

“여기 우리 집인 거 알고 온 거야?”

“너 그때 튀었을 때 니가 말해줬잖아.”

“안 튀었다고 했다. ”

 

둘이 오토바이를 앞에 두고 앉아 시시한 얘기를 했다. 그런데 싫지 않았다.

 

“나 알바비 받았는데 밥 사줄까?”

“됐어. ”

 

난 멀뚱히 김식을 쳐다보았다.

 

 

“너 집에 들여줄 생각 없잖아. ”

‘아니…“

“내가 챙피한가봐. 길바닥에 앉혀만 두고.”

“그게 …”

 

시선이 부딪혔다. 김식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김식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적당한 말을 찾으려 했지만 딱 떠 오르는 말이 없었다.

 

김식이 허리를 펴며 몸을 일으켰다. 나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도청 언니들이 김식을 보면 키 크다고 난리가 나겠네 하며 잠깐 생각했다.

 

김식이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저기…그런 거 아니야.“

 

금방이라도 출발할까봐 급하게 입을 열었다. 김식이 빤히 나를 쳐다봤다. 나를 땅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애꿎게 신발로 땅바닥을 툭툭 찼다.

 

‘엄마가… 너무 좋아할까봐….“

 

정수리가 뜨끈뜨끈해졌다. 나를 쳐다보는 김식의 눈이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지만 뜨끈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불쑥 손이 나와 앞머리에 꽂아 놓은 핀을 채갔다.

 

“아야!”

 

푸르르 흘러내리는 앞머리에 오른 손을 올렸다.

 

“너…머리에 그거 하지마. ”

 

김식이 턱으로 내 머리를 가리켰다.

 

“왜?”

 

나는 여전히 머리칼을 잡은 채 발끈하며 김식을 노려보았다.

 

“못생겼어.”

‘진짜…뭐라는거야..“

 

약 올라 하는 나를 보며 김식이 웃었다. 이제야 마음이 풀린 것 같은 표정이다.

 

“이거 가져가.”

나는 현기네에서 받아온 파란 아오리 사과 봉지를 김식에게 내밀었다. 잠깐 내 손을 바라보던 김식이 천천히 그 봉지를 받았다. 안을 확인하고는 하! 하고는 코웃음쳤다.

 

“오늘은 내가 백설공주인건가?”

“뭐래.”

“언제와?”

“다음주 쯤?”

“간다.”

 

오토바이에 훌쩍 올라탄 김식이 시동을 걸었다. 뭐라 말을 더 걸어야 하나? 나는 머뭇거렸다. 그 사이 단단한 헬멧을 쓴 김식이 내 앞으로 오토바이를 스윽 몰았다. 놀라 옆으로 풀썩 비키자 한번 더 장난 하듯 내 앞으로 바퀴를 밀며 따라왔다. 그리곤 이내 냉정히 등을 보이며 출발해 버렸다.

 

“대체 왜 온 거야? 이 먼데까지.”

시끄러운 오토바이 굉음이 사라질때까지 나는 그 그늘에 서 있었다.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과일도 주고 시원한 물도 줄걸 그랬나? 잠깐 후회했다. 그렇게 한참을 길바닥에 서 있었다.

 

 

“아이고 막내야. 뭐하느라… 아이스크림이 다 녹았네, 녹았어. 못쓰겠네.”

 

내가 가져온 까만 봉다리를 받아 든 엄마의 잔소리가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어차피 개학이 멀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이 집에서 예전에 못했던 자매 놀이에 집중했다.






꼬랑쥐-


너무 더워 컴 앞에 앉을 짬이 없어

조금 늦었습니다.


예전에 제 엄마께서

이남이의 울고싶어라 가 나왔을때

종이에 가사까지 적어가면서 열심히 그 노래를 외웠더 기억이 있습니다.


인경이네 엄마는 제 엄마를 많이 닮아 있습니다. 



푱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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