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평범한 날이었다.

입춘도 지나고 경칩도 지났지만 아직 추웠다. 꽃샘추위라고 하지만 이정도 추위라면 꽃이 피는 날이 올 것 같지 않은 까칠한 추위였다. 적당히 실수를 하지 않을, 혹여 실수가 있더라도 대처 할 수 있는 적당한 연차의 직장생활. 특별할 것도 없고 긴장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새털 같은 평범한 날 중에 하루였다.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먹은 백반 반찬과 식후 마신 천 원짜리 아메리카노도 평범했다. 사회적 가면에 익숙한 무난한 일상. 어찌 보면 안전하다고 할 정도의 무난한 날이었다.

 

퇴근 시간을 적당히 앞둔 익숙한 일에서 오는 나른함과 신체가 보내는 노곤함이 밀려왔다.

잠시 쉴까?

수년 째 익숙한 루틴이지만 가끔씩 오류가 난 것처럼 삐그덕 거릴 때도 있다.

 

                    부대찌개 먹고 싶다.

 

무심코 휴대폰을 들어 이틀 전에 불쑥 도착한 메시지를 다시 열었다.

 

아주 짧은 그냥 평범한 문자.

피식 웃음이 나며 잠깐의 나른함이 도망갔다.

단 한 줄짜리 메시지는 상대에 대한 성의도 없고 뒷 끝도 없다.


이 년 전에 한국을 떠난다 라며 간단한 이유도 출국지도 없이 이 땅에서 사라진 대학동창. 몇 달에 한번 씩 잊어 버릴만 하때 쯤 사진이나 짧은 문자로 생존을 알리는 정도. 이번에도 역시 뜬금없기도 하지만 그 녀석 답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평범했다. 한국과 시차가 다른 어느 하늘 아래 숨 쉬고 있을 자유로운 김식의 모습이 잠깐 상상이 됐다. 덕분에 커피 믹스 정도의 나른함을 깨울 파워는 있어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더디게 간다고 느꼈던 시간이 훌쩍 지나 어느새 퇴근시간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정시퇴근이다. 이런 직장을 얻기 위해 취업 시장에서 꽤나 정성을 들여 탐색기간을 가졌었다. 아마도 나 만큼이나 탐색 기간을 가진 동료들이 서서히 그러나 부산스럽게 외투를 걸쳐 입고 가방을 챙긴다.

 

적당히 평범한 인사들을 남기고 하나 둘 씩 혹은 삼삼오오 짝을 지기도 하며 사무실 문을 나선다. 저 무리 중엔 퇴근 후 치맥을 약속한 무리도 있을 것이고 나처럼 무리가 싫어 철저히 외톨이를 고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컴퓨터 전원을 망설임 없이 꺼버렸다.

아침에 입고 나왔던 겨울 외투를 걸쳐 입었다. 해가 지기 시작한 밖이 아침 보다 더 추울까봐 단단히 여몄다. 그리고 몇 년 째 출퇴근 때 사용하는 내용물이 그다지 바뀌지 않는 무난한 가방을 챙겨들었다.

혹여 놓고 가는 게 있는지 눈으로 꼼꼼히 확인을 한 후 허리를 곧게 폈다. 행여 놓고 가더라도 중요한 물건은 별로 없다. 


오늘을 일기장에 따로 적는다면 정말 재미없고 지루하고 별 쓸 말도 없는 그러저러 한 날 들 중에 하나로 지나갈 날 일 것이다.

나는 익숙해지고 있었다.

적당히 지루하고 평범한 삶에.

 

 

공기의 흐름이 뭔가 달랐다.

계단을 통해 로비로 내려서자 퇴근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올 시간이라 늘 어수선 하긴 하지만 뭔가 달랐다. 속닥임과 부산스러움이 섞여 있는 공기 속으로 평상시와 소음이 들려왔다.

앞쪽에 있던 누군가가 작게 속삭였다.

 

“노숙자가 들어 왔나봐.”

내가 근무하는 건물은 노숙자가 들어올 만한 위치에 있는 곳이 아니다. 주변에 번화한 건물도 없고 사람들의 이동이 많은 곳도 아니다.


점차 계단을 다 내려가 라운지로 발을 딛을 때 수군거리는 소리가 정확하게 들려왔다.

“어머어머, 진짜 노숙자네.”

“놀래라, 노숙자가 여기 뭔 일로 들어왔대?”

평상시 특별한 이벤트가 없는 평범한 직장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쉽게 호기심을 드러냈다.

 

 

출입구를 가로막고 선 듯 키가 껑충 하니 큰 남자와 그 앞에 머리 하나 작은 청원경찰이 실갱이 하는 듯 대치하고 서 있다. 하필이면 퇴근하는 사람들이 꼭 지나쳐야 하는 위치에 두 사람이 있어 누구라도 볼 수밖에 없는 위치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언제 씻었는지 알 수 없는 기름기 번질거리는 목선을 덮고 있는 꼬죄죄한 머리카락, 앞 머리칼을 대충 모아 묶은 머리, 얼굴의 반 정도를 너저분하게 자란 수염. 아직 추위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바지 차림으로 드러난 맨다리에 얄팍한 쪼리 신발. 맨투맨 티셔츠 정도. 다행히 웃옷은 반팔이 아닌 정도. 누구나 한눈에 봐도 외투도 없이 겨울을 난 불행한 노숙자라 할 만한 차림이다.


누군가 장소와 시간을 착각하고 데려다 놓은 듯 남자의 차림은 이 장소와 계절과 시간에 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발 치에는 남자의 짐인 듯 검은 두덩이 정도의 가방이 놓여있었다.

“사람들 나가야 하는 거 안 보여요? 얼른 나가세요! ”

대치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청원경찰의 목소리에 압박감이 실렸다. 빨리 처리하고 싶은 조급함이 묻어난 목소리였다.


 

“잠, 잠시만요.”

“이 사람이…….”

“만날 사람이 있다니깐요. 곧 내려올 겁니다..”

“방해 되니깐 나가서 기다리세요, 그럼.”

“밖에… 추워요.”


훌쩍 큰 키와는 어울리지 않게 상체를 한껏 웅크리고 팔을 옆구리에 낀 채로 주눅 든 목소리에 누군가가 픽 하며 웃는 소리를 냈다.


“그러네. 그렇게 입고 다니니 춥겠지.”

“맞네, 맞아”


노숙자의 말에 누군가는 추임새를 보탰다.

적당히 혼잣말로 수긍하는 소리도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또 한 쪽에서 터지자 곳곳에서 노숙자의 말에 수긍하는 듯한 동의도 터져 나왔다.

추운 겨울을 지나는 동안 외투 하나 못 입은 무능한 노숙자를 향한 작은 동정심도 들어있다.

 

이제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호기심을 드러냈다. 얼른 로비를 빠져나가고 싶어도 두 사람의 대치에 뒤쪽으로 점점 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까치발을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대치한 두사람을 구경하는 적극적인 관객도 보였다.

청원경찰의 표정은 빠른 속도로 난처함으로 더욱 일그러졌다.

 

“그럼 빨리 연락을 해 보던가?”

청원경찰은 자신의 휴대폰을 노숙자를 향해 내밀며 종용했다.

“통화 못해요. 전화번호 못 외어요.”

 

“아, 나 참. 이 사람이… ”

청원경찰의 채근이 계속되지만 남자는 꼬박꼬박 성의 있게 대답했다.


“나도 여기 정리해야 되는데 이러고 있으면 어쩌라고? ”

“곧 나올거에요. 정시 퇴근하는 직장이라 좋다고 했거든요.”

“그럼 여기 맞네. ”

“여기 맞아요.”

누군가 또 추임새를 넣었다.

“하, 나 참. ”


늘 지루하고 평범한 이 생활을 만족하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벤트 같은 이 사건에 신이 난 듯도 보였다.

라운지로 나오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새롭게 등장한 사람들은 정체된 사건에 대한 호기심을… 이미 정체의 원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뜻밖의 사건에 살짝 흥분한 듯 노숙자와 청원경찰 구경을 했다.



 

노숙자 따윈 관심 없었다. 나완 상관없고 그냥 번잡스런 사고 같은 거였다.

그냥 지나가야 할까?

저 소란은 곧 끝날테니 사람들 눈에 튀지 않게 기다릴까?

살짝 짜증이 났다.

단단히 여며 입은 탓에 답답하고 체온이 오르는 듯도 했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볼까 하고 동선을 재보고 있을 때였다.


“꼉!

노숙자라 생각했던 남자가 몰린 사람들 쪽을 두리번거리더니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저기 있어요. 저기.”

그동안 한껏 옹크리고 섰던 상체를 활짝 피며 한손을 번쩍 집게 손가락으로 안쪽을 정확하게 가르켰다.

앞쪽에 서서 이 헤프닝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남자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꼉!”


그리고 남자는 정말 반갑다는 듯 온 몸을 다해 풀쩍풀쩍 뛰었다.

훌쩍 큰 키 노숙자가 사람들 사이에 묻혀 본인이 안 보일 까봐 훌쩍 풀쩍 퓌어 본인을 알렸다.

나 좀 쳐다봐 달라고.


“ 경, 꼉!”

노숙자는 유치원 아이처럼 온 몸으로 성의를 다해 숙제를 끝냈다는 듯 신나게 행동하며 두 팔을 올려 훠이 훠이 저었다.


“거봐요.”

내 말이 맞잖아 라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청원경찰을 향해 씩 웃었다.

신이 나서 손을 저어대는 남자의 매우 무해한 행동이었지만 그 앞에 청원경찰은 보이지 않은 힘에 밀리듯 휘청거리는 듯 했다.


“꼉.”

 

“이분 아시는 분 있습니까?”


청원경찰이 안쪽을 향해 애처롭게 소리 질렀다.

“저기, 저기요.”

다시 긴 손을 들어 한쪽으로 정확히 가리켰다.

사람들이 그 손가락을 따라 길을 내주듯 비켜섰다. 그리고 함께 고개를 돌려 뒤쪽에 선 사람들을 꼼꼼히 얼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설마?


앞쪽으로 섰던 사람들이 빠르게 옆으로 몸을 돌려 길을 내주었다. 평상시 무기력함과 반복성으로 일관하던 사람들에게서 보기 힘든 재빠름이었다.

“꼉,”

커다란 노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눈이 확 커졌다.

“나, 나.”

집게 손가락으로 자신을 맹렬히 가리키며 알아봐 달라고 소리치는 저 어딘가 낯익은 몸.

순간 나도 무언가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이 밀려와 휘청였다.

노숙자 아니, 김식이 청원경찰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러자 어수룩한 그동안 외양에 가려졌던 하얀 치아가 눈부시게 드러났다.


 

“이제 됐죠?”

노숙자 외양의 김식이 당당하게 발 밑에 둔 백팩 잡아 들고 크로스로 된 가방을 단단히 잡아 매며 당당하게 허리를 쭉 폈다. 주변 누구보다도 큰 키가 모두의 시선을 당당하게 아랑곳 않고 받았다.

가방을 먼저 알아봤다. 언젠가 천만원이 넘는다는 카메라를 샀다며 자랑하던 그 얼굴과 그 장소와 그때의 카페까지 한꺼번에 떠올랐다.


“조팀장. 얼른 옷부터 사 입혀야겠어.”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훈수를 두자 와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평상시 재미없고 지루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동료들이 날린 장난기 가득한 추임새에 당황스러웠다.

맨 다리를 당당히 드러낸 노숙자가 아니 김식이 추위 따윈 잊은 듯 허리를 펴고 성큼성큼 사람들 비워준 길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김식의 눈이 반가움에 예쁘게 반달로 접혔다.

그동안 직장에서 쌓아왔던 안전한 이미지와 열심히 그어놓은 적당히 안전한 선이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빨리 사라지자.


순간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나에게 걸어오는 김식을 향해 빠르게 걸어 출입구 쪽으로 밀었다. 걸어오던 반향과 반대로 밀려 허둥허둥 팔을 내젖던 식이 내 기세에 밀리며 주변 사람들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여유롭게 퇴장선언을 했다.

우리 두 사람이 출입구로 갈 때까지 응원과 웃음이 함께 따라왔다.

 


잠깐의 이벤트는 끝이 났다.

출입문을 열자 매서운 칼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때려왔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나는 것도 같았다.

“아, 한국 너무 추워!”

식이 옆으로 바짝 파고 들었다. 키가 머리 하나 더 큰 주제에 팔짱을 잡아 당기듯 끼고 몸을 잔뜩 움츠렸다.

“나 부대찌개부터… 배고파.”


허 참. 탄식이 나오려했다.

일단 사람들 시선에서 벗어나자.


방금까지 노숙자였고, 지금도 노숙자 차림인 김식을 보면서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인사말 따윈 필요 없다. 이 년 여 만에 보는 것이긴 하지만 사람들 시야에서 김식을 숨기는 게 더 급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칠 것 없는 김식을 데리고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었다.

주차장으로 빠르게 걸었다. 식이 슬리퍼 바람으로 오돌오덜 떨면서 열심히 따라왔다.

“너무 춥다.”

김식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과도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춥겠지. 가끔씩 보내주는 연락에는 뜨겁고 뜨거운 지역에서 놀고 있던 것 같았으니까.


 

아침에 사람들과 되도록 마주치지 않으려 한쪽 구석에 세워둔 차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우리 뒤쪽으로 우르르 나온 사람들이 스쳐지나가기도 뒤따르기도 하며 소리를 냈다.

본인들의 차를 찾은 사람들이 흘끔흘끔 고개를 돌리며 이벤트의 뒷 무대가 궁금한 듯 바로 출발하지 않고 여유를 부려댔다.


아, 리모트키 였으면 빨리 문을 열었을텐데….

남들이 새 차를 사고 리모트키를 자랑할 때 아무런 불만도 불평도 없었는데 오늘은 낡은 수동식 열쇠형 키가 조금 짜증났다.

차키를 꺼내 조수석 손잡이에 열쇠를 끼워 넣었다.


“빨리타! ”

낮고 빠르게 오랜 시간 훈련시켜 온 강아지를 향한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쪼끄만 데?”

추위에 달달 떨면서도 식은 작은 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머뭇거렸다.

“나 못 들어 갈 거 같은데? ”

“전에는 탔었잖아.”

“차가 더 작아진 거 같은데?”

“그럴 리가, 얼른 타.”


아직도 주차장 곳곳에서 노숙자와 나의 상황을 지켜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냥 몸을 접어 넣어.”

이를 악물고 강하게 명령했다.


예전에도 차에 탈 때 이런 소리를 똑같이 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봐줄 마음이 없었다.

내일 쯤이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낼 것이다. 그동안 조용하고 사회적 관계로 적당히 유지되던 선을 넘어 다가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적당한 왕따 같은 위치가 딱 좋은데.


“한번 더 징징거리면 놓고 간다.”

순간 식의 어깨가 움찔 한 것도 같다.

“알았어.”

식의 포기는 빨랐다.


식은 뒷자리 문을 열어 가지고 온 가방을 던져 넣더니 말 그대로 조수석 자리에 큰 몸을 구겨 넣었다. 그리곤 자리를 최대한 뒤로 밀며 부스럭 거렸다.

나도 빠르게 차를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고 뒷자리에 던져둔 무릎담요를 김식에게 던졌다.

“으, 추워, 추워”


이빨을 부딪히며 떠는 모습이 주인 잃은 강아지 낑낑 거리는 모습 같았다.

담요를 받아 슈퍼맨의 망토처럼 어깨로 두르면서도 달달 다리를 떨어댔다.

“엉따 …틀어줘.”

덜덜 거리는 모습이 안스러워 꽁꽁 여몄던 외투를 벗어 김식의 무릎위로 던졌다.

“엉따 없어. 참아.”


혼자 타기엔 적당한 김식과 함께 타기엔 좁은 그 차를 되도록 빠르게 운전했다.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



 

 

쌀쌀한 날씨의 퇴근길, 부대찌개 식당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벌써 소주병이 서너 병 올라온 자리엔 취기와 함께 흥도 올랐는지 사방이 시끌벅적했다. 어지간히 떨었는지 온돌이 깔린 바닥에 앉자마자 으구구 앓는 소리를 했다.


“빨리 밥. 많이 시켜 줘. 아이구 좋다. ”

오랜만에 온돌 바닥이 정말 좋은 모양인지 헤죽헤죽 흉하게도 웃는다.

어느 경유지 공항에서 휴대폰을 읽어 버렸다고 했다. 그래도 예전에 취업하고 몇 번 데리러 왔던 내 직장이 생각 나 공항에서 바로 나를 찾아 왔다고 했다. 부대찌개가 먹고 싶어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오래된 친구로서 이 정도만 해주자 싶은 마음에 주문을 해주었다.

보글보글 찌개가 끓기 시작할 때 쯤 식은 추위가 대충 가신 것 같았다. 여전히 내가 준 무릎 담요를 슈퍼맨 망토처럼 뒤집어쓰고 며칠 굶은 사람처럼 빠르게 먹기 시작했다. 그 꼬락서니가 딱 과거에 낙방하고 돌아온 딱 이몽룡 같았다.


라면사리 두 개를 다 건져먹고 소주 한 병도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살 것 같다.”

식은 테이블 위의 휴지를 꺼내 입 주위를 닦으며 동시에 불룩 나온 듯 한 배를 만족스럽게 두드렸다. 김식이 아니라 밥식이 맞는 것 같다.


“아, 이게 그리웠어.”

식의 엄청난 속도가 놀라워 나는 아직 반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였다.


“등 따시고 배 부르고, 딱 좋다. ”

물을 한 컵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테이블 위로 컵을 탁하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우리, 결혼하자.”


말문이 막힌다는 건 이런건가?


“뭐래는 거야?”


미친 건 가? 하는 눈빛으로 김식을 쳐다보았다.

외국에서 살더니 한국말을 잊은 건가?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눈빛에 날이 바짝 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혼이 뭐 별건가, 뭐?”

“미친….”

회사 로비에서 봤을 때보다 더 노숙자 같은 꼬락서니를 하고선 저 말이라니?

질 나쁜 농담인가?

뭐라 한마디 공격하려 입을 막 열려는데 식은 마치 재채기를 했는데 미안해 하는 표정으로 빠르게 주제 전환을 했다.


“나 밥 볶아 먹어도 돼?”

“너….”

내 뒷말을 죄다 짤라 먹으며 능숙하게 말꼬리를 돌리는 김식이라니.

“소주도 더 먹고 싶은데! 안되겠지?”

점점 사나워지기 시작한 내 눈빛에 눈치를 보는 듯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알았어, 알았어. 밥만 더 먹을께. ”

김식이 항복을 하듯 두 손바닥을 들어 내게 내 보였다. 나 혼내지 마 라는 의도가 명백하게 들어있다.

“이모님! 여기 밥 좀 볶아 주세요.”


식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금요일 저녁 사람들로 가득 찬 시끄러운 맛 집에서 주위를 끌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손을 흔들었다. 혼잡한 로비에서 나를 만났을 때처럼.


잠깐 침묵이 흘렀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고 식은 황홀한 시선으로 전골 냄비 속에 능숙한 손놀림으로 볶음밥을 만드는 아주머니의 손을 쳐다보느라.


“너, 취했어? ”

아주머니가 사라지자마자 눈짓으로 테이블 한 켠에 거의 빈 소주병을 가리켰다.

“뭐야? 꼉. 꼴랑 한 병으로 뭘 취해. 한 짝이면 모를까.”

지나치게 태연한 자세로 볶음밥 한숟가락을 떠 세상에서 유일한 음식을 맞이 하는 듯 경건하게 입으로 가져갔다.


 

“꼉 이 볶음밥 맛있다. 먹어봐.”

스무살, 처음 만났을 때 식은 직선 밖에 몰랐었다. 물론 그때의 나 역시도 직선 밖에 몰랐다. 물러설 줄도 우회할 줄도 뒤로 돌아설 줄도.

“역시 사람은 배가 불러야 한다니깐. ”


눈을 찡긋 하며 내게 수저를 어서 들어보라고 제스쳐를 했지만 입맛은 달아났다.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식이 만든 덫이 있는 것처럼 저 깊은 속에서 속삭임이 들려왔다. 위험하다고.

식은 나를 아랑곳 않고 아직 배가 덜 찬 듯 볶음밥을 떠 먹기 시작했다. 수저로 냄비를 바닥을 낼 듯한 기세로 식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내가 다 먹는다.”

부숭부숭한 수염을 달고 예쁘게 눈을 접었다.

“이모! 여기 음료수 한 병 더 주세요.”


또 다시 손을 번쩍 들어 내 주의를 돌렸다.

그런데 지금 식은 그런데 지금의 식은 곡선도 알고 각도 알고 뫼비우스도 익힌 것 같다. 어느새 처세술이 제대로 노련해 진 것 같다.


 

차가운 탄산을 가진 음료를 뽈뽈뽈 따라 내 앞으로 컵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을 컵에 따르지도 않고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 꿀꺽 꿀꺽 마셨다. 금세 비어버린 빈병을 비장하게 내려놓았다.

왜장을 만나러 가는 논개처럼 굳은 다짐을 한 표정으로 수염이 부숭부숭 난 얼굴의 식이 말했다.

 

“집에서 상속 받아가래.”

이십년을 알고 지냈는데 김식이 상속 받을게 있다고? 대꾸할 가치도 없어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뭔가 부비트랩이 튀어나올까봐 경계했던 내가 한심해졌다.


“ 헐… 꼴랑 부대찌개 값도 없는 놈이 상속? 상속이라고? ”

“아, 쫌 있어.”

“그래, 받아서 옷이나 사 입으면 되겠네.”

더 들을 것도 없어 가방을 챙겨 일어나려 했다.


 

“야, 잠깐.”

일어서는 나를 식이 급하게 말렸다.

나는 반쯤 일어서다 말고 식을 다시 쳐다보았다. 또 뭔 개소리를 하려고? 는 눈빛으로 최대한 쏘아보았다.

“ 노친네 쓰러졌다고 해서 나 뒷정리도 못하고 바로 비행기 타고 들어 온 거야.”


말에 모순이 있다. 어른이 쓰러지셨는데 부대찌개를 먹는다고?

이건 더 개소리다.


“일단, 위급한건 아니래. 공항에서 연락했어.”

“헐. 미친놈.”

“혼인신고서 가져오래. 그 전엔 꼴 보기 싫다고… 내 꼴 보면 혈압 오른다고.”

더 들을 것도 없다.

정말 질 나쁜 농담이다.

가게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겉옷을 챙겨 입었다.


“야, 야. 너도 따로 결혼 하고 싶은 사람 없고, 나도 없어. 그리고 너도 어차피 한번쯤은 결혼해야 하고 나도 결혼해야 하고. 그럼 문제 해결된 거 아냐?”

단추를 채우는 내 손을 따라 식의 말투가 빨라졌다.


“꼉, 더 들어 봐.”

“시끄러. ”

“어어어, 이건 진짜라고.”

식도 벌떡 일어섰다. 허리를 펴고 선 식을 올려다 보았다. 행색은 웃겼지만 표정엔 장난끼가 없다.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더 있다간 식을 후려 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해라. 김식.”

차갑게 등을 돌렸다. 마루 아래에 벗어 놓은 신발을 찾은 데 내 신발이 잘 보이지 않는다. 화가 치밀어 시야조차도 또렷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야, 나 한국 돈 없어. 같이 가.”

식이 빠르게 옆으로 다가왔다.

이번엔 식과 멀어져야 할 것 같았다.


사람들 발에 채여 밀려난 신발을 찾아 신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뒤로 식이 신고왔던 쪼리를 찾느라 부산스러운 사이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출입문을 열자 차가운 이른 봄바람이 매섭게 다가왔다.



 

화가 났다.

정확히 어느 부분에 화가 났는지 알아 채진 못했지만 화가 났다. 주차한 차 쪽으로 걸어가는 걸음은 빠르고 격렬했다. 숨이 급하게 차올랐다.

슈퍼맨처럼 담요를 목에 두른 식이 빠르게 따라왔다.


“같이 가.”

가게 불빛이 쏟아져 나오는 밤 거리에 맨 다리를 내놓은 식이 미친놈처럼 따라왔다. 빠르게 걸었지만 곧 따라잡히고 말았다. 식이 내 어깨를 잡았다.


“뭐?”

“뭐?”

나의 화가 난 눈과 영문 모른다는 듯 순진한 식의 눈이 마주쳤다.

 

“결혼이 하고 싶으면 해.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어깨를 잡혔던 손을 털어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귀아. 너 선보는 게 얼마나 귀은 일인지 알아?”

추위에 달달 떨면서 식이 뒤쫓아 걸었다.


“그럼 예전에 너 좋다고 따라다니던 애들 있잖아. 그 중에 골라서 해”

퉅툴거리는 천진난만한 식의 목소리가 약을 올리는 것 같았다.


 

“너가 있는데 굳…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서자 뒤 따라오던 김식이 온 몸으로 부딪혀왔다. 그 체중에 잠시 휘청거리자 식이 빠르게 나를 잡아 왔다. 하지만 난 그 손길을 뿌리치며 한발 밀어 냈다. 커다란 식이 살짝 뒤로 밀려났다.

 

“야, 김식. 굳이 라는 단어에 내가 포함 되는지 몰랐네.”

“왜 안 되는데?”


성큼 식이 한 발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한발 나도 그 만큼 뒤로 물러섰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쓰는 것 같은 김식을 내려치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참으며 한껏 식을 노려 보았다.

“명의도 다 너꺼해. ”

“야, 김식.”

“너 공부 더 하고 싶어 했잖아. 하고 싶은 거 할 정도는 될 거야.”

“고만해라.”

“난 밥만 먹여 주면 돼. 그냥 다 너 해.”


죽도록 노려보았다. 이 멍청아, 요지는 그게 아니라고.

한발, 다시 식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한발, 나는 다시 뒤로 그 만큼 물러섰다.


“왜에? 왜…싫은데?”

이번엔 나를 달래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게 어리광 부리듯 말했다.

한숨이 나왔다.


“너랑 결혼 안할 이유를 백가지도 말할 수 있어.”

“호올~ 백가지나? ”

파르르 떨며 잔뜩 웅크리고 있던 김식이 허리에 세우며 당당히 가슴을 폈다.

다시 한발 식이 다가왔다.

자, 말해봐 라는 듯 당당한 표정이다.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첫째, 난 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 내가 본 결혼의 샘플들은 전부 불행하니까. 둘째, 그래 결혼을 한다고 쳐. 그래도 너랑 결혼 하고 싶지도 않아. 넌 비겁하고 게으르고 재수도 없지만 친구니까. 셋째, 상속 받아야 한다고 결혼 같은 걸 하자는 너가 ,무례하기 짝이 없는 너 따위가 친구라고 ? 넷째 굳이? 구우지? 그리고….”

숨도 안쉬고 내 질렀다. 내 눈에서 레이저 빛이 나온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미친 놈이 청혼을… 부대찌개 먹다 말고 하냐고?”

꾹꾹 누르려고 했던 울화가 치밀어 올라 비명처럼 새된 소리를 질렀다.

“ 그게 서운한 거였어? ”


내가 하는 말에 손가락을 접어가며 경청하던 식이 피식 웃었다.

또 한발 식이 내 쪽으로 한발 다가서자 그 만큼 내가 뒤로 물러섰다.


“그럼 남들처럼 삐까 번쩍하게 차려입고 다이아 반지로 정식으로 청혼하면 돼?”

“내 말이 그게 아니잖아?”

이렇게 말이 안 통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았는데, 제자리를 반복하는 대화에 열통이 터졌다.

 


짜증스럽게 식을 노려보았지만 식은 끄덕도 없는 듯 내 앞에 단단히 버티고 섰다. 휙하니 돌아서 빠르게 차를 향해 걸어갔다. 빨리 식을 떨쳐내고 내가 만들어 놓은 평화로운 성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주차해둔 차를 찾아 가방에서 열쇠를 찾았다. 차문을 열려 키를 갖다 댔지만 화가 너무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화를 측정하는 기계가 있다면 분명 맥시멈까지 달았을 것 같다. 모욕과 화로 범벅이 된 심장이 쿵쾅 거리는 소리로 귀가 먹먹해 지는 것 같았다.


내 뒤를 따라온 식이 조수석 쪽에 서더니 태연한 표정으로 두 팔로 차 지붕에 두 팔을 걸치고 기대여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조그마한 차를 사이에 두고 둘의 시선이 팽팽하게 얽혔다.

 

“겁쟁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벌벌 떨던 추위 따윈 아랑곳 않고 식이 놀리듯 말을 했다.


“어차피 넌, 너를 나한테 버렸잖아. ”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장난기는 한 톨도 남지 않은 낮고 묵직한 목소리였다.

차가운 바람이 식의 길어진 머리칼을 쓸고 갔지만 이번엔 식은 춥다고 몸을 웅크리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지도 움츠리지도 않고 곧게 버티고 섰다.


스무살의 김식처럼 서늘하게 단단하던 그 예쁜 시절의 얼굴과 겹쳐졌다. 절대 꺽이지 않을 듯 강하고 뜨거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넌 내꺼.… 맞잖아?”

 

뭐가 문제야? 식의 표정 속에 숨겨둔 그 말이 뇌 속으로 바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장난꾸러기처럼 굴던 식은 세상 진지한 시선을 내게 부딪혀왔다.


내 표정을 읽어낸 식이 결정적 펀치를 날린 듯 기세당당한 표정으로 눈을 반달로 접으며 예쁘게 씨익 웃었다. 이 싸움에선 내가 이겼어, 하는 자신감 가득한 표정이었다.

내 안에 뭔가 쿵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친 김식이 돌아왔다.

잔잔하고 지극히 평범하고 안정된 내 삶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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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랑쥐-


작년 이맘때 요파트를 써놓고 미루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쓴 글이라 문체도 시점도 제 글투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평면적이라 어디에도 피용이 냄새가 나지 않는 글을 보면서

다시 돌아갈수 없을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단 미루에게 요만큼을 보냈네요.


그.러.나

미루는 저를 너무 잘 알았고 꼴랑 이 파트 하나에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다 알아채버렸고, 답장을 보내줬어요.


올해가 되어

조금 더 생기를 찾은 

조금 더 피용이 냄새가 붙은 글로 수정에 수정에 수정에 수정에..

그리하여 미친김식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푱이가



dupiyongstar@naver.com




덧- 이 글을 보신 분들은 부대찌개가 땡기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