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어둠과 빛의 경계, 밤과 낮이 만나는 시간 새벽이다.

잠이 들었나보다.

창문 아래서 소곤소곤 소리가 사라지길 기다리다 깊게 잠이 들었다. 해가 들지 않은 창문 작은 틈 사이로 어스름한 새벽빛이 어른거렸다.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어지럽지도 숨이 가쁘지도 않은 것을 확인했다. 흐린 어둠 속에서 후드 점버를 챙겨 입고 문을 향해 걸었다.

 

바스락.

문 앞에 거의 다다랐다 싶을 때 발치에 뭔가가 걸려 발이 꼬여버렸다.

탕 타타탕.

요란한 소리가 고요한 방안을 진동했다.

황급히 두 손을 뻗어 문을 잡는 바람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벽을 더듬거려 불을 켰다.

환한 불빛이 눈을 찌르듯 쏟아졌다. 잠깐 어지러움이 밀려와 차가운 문을 잡고 버티고 섰다.

발에 걸린 건 슈퍼마켓 로고가 선명한 하얀 비닐봉투였다. 어제 긴 시간을 보낸 후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문 앞에 내 신발과 가지런히 있던 비닐봉투였다.


어둠속에 방치되어 있던 봉투가 내 발에 걸려 안에 내용물이 뒹그르르 구르고 튕겨 나왔다. 오렌지 주스와 생수가 반쯤 튕겨 나와 쓰러져 있다. 그 옆에 황도 복숭아 캔 두 개가 엉켜 있다.

 

쪼그리고 앉아 흐트러진 봉투를 정리했다. 봉투 안에는 초쿌릿과 두통약과 버터링쿠키, 에이스 등이 들어 있었다. 내용물은 재각각이었지만 목적은 하나였다. 어쩐지 나에게 기운내 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아 픽 헛웃음이 났다.

 

그리고 좀 더 안쪽으로 현주가 꼭 먹어야 해 하면서 밀어 넣었던 봉지는 다행히 내 발에 채이지 않고 살아남았다. 봉지 안에는 잘 포장된 플라스틱 용기에 죽이 담겨 있었다.

비닐봉투를 대충 정리해 좁은 싱크대 위로 올려놓고 얌전히 놓인 운동화를 들고 문을 열었다.

철컥.

고요한 시간에 소리가 저 혼자만 살아있는 듯 울렸다.

 

싸한 새벽 바람이 밀려왔다.

밤과 낮이 교차되는 아주 짧은 시간. 탁탁 운동화를 신고는 바닥에 발을 디뎠다. 다시 호흡이 목까지 급하게 차오를까 싶어 가만히 기다려보았다.

 

깊은 가을의 냄새가 훅하고 끼쳐왔다. 선뜻한 바람에 목 뒤에 후드를 잡아 깊숙이 눌러썼다.

벽을 바라보는 시간이 지나고 제대로 잠을 자고 나니 정신은 돌아왔다. 우선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사람이 없는 흐린 빛의 거리에 조심스럽게 걸었다. 가끔씩 찾아가는 공중전화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흐물흐물 녹기 직전의 걸음을 추스르며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등 뒤로 식은 땀이 솟았다.

며칠을 벽만 바라보며 혹사한 몸이 항의를 했다.

어차피 내가 갈 지자로 걷든 기어가든 나를 볼 사람은 길거리에 없었다. 평소보다 느리지만 꾸역꾸역 걸어 공중전화기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하숙생, 자취생을 위한 두 개짜리 부스 안에 불빛이 노랗다.

주머니에 잡히는 대로 동전 여러 개를 밀어 넣었다.

촤르르 촤르르 동전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꾹꾹 손가락으로 번호를 공들여 눌렀다.

띠르르 띠르르 신호가 두 번 울리자 달칵 소리가 나며 바로 [여보세요] 소리가 들려왔다.

공중전화까지 힘들여 왔는데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지 머리가 엉켰다. 내 숨소리가 새액새액 수화기를 넘어갔다.

 

[막냉이냐?]

“…응.”

[우리 막냉이… 괜찮냐?]

“…응.”

[그래, 괜찮다. 다 지나간다. …괜찮아. ]

“응.”

 

[하마 방학 얼마 안 남았지?]

“응.”

[현기가 너 언제 오나 벌써부터 목 빼고 기다리고 있더라. ]

“응”

 

[여긴 아무것도 걱정할 거 없다.]

“응.”

[밥 거르지 말고, 꼭꼭 챙겨 먹어라. ]

“응, 엄마”

 

엄마가 말을 하는 동안 애꿎은 전화부스의 모서리만 열심히 쳐다보았다.

두 손으로 수화기를 꼭 붙잡고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못했다.

엄마는 장례식장에서 어땠는지 나를 기다렸는지 내가 안가서 화가 났는지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저 바보같이 응, 엄마만 했다.

 

천천히 수화기를 내렸다.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엄마의 목소리에, 엄마의 괜찮다는 말에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목도 말랐다. 겨우 응하고 소리 내는 게 고작이었건만 목은 갈라질 듯 메말랐고 급격히 위가 아리고 쓰려왔다.

 

다시 느리게 내 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고개를 수그리고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타박타박 걸었다. 배가 등에 붙은 것 같아 손으로 배를 감싸고 느리게 걸었다.

 

갑자기 내 시야에 낯선 신발이 불쑥 나타났다.

가재처럼 옆으로 두 걸음 피했더니 그 운동화가 내 방향으로 따라왔다. 다시 옆으로 한 발짝 옮기려는데 다시 그 운동화가 내 방향으로 따라왔다.

 

“하아.”

 

몸에 남은 기운을 다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의도적으로 내 앞을 막는 것 같은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후두를 살짝 올렸다. 의외로 키가 커서 앞을 막고 있는 사람의 목 부근이 보였다. 어쩐지 낯이 익은 듯한. 고개를 조금 더 들어 위쪽을 쳐다보았다.

내가 사는 건물 앞에 김식이 서 있었다.

잠깐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 대충 여기 쯤인가? ”

 

후드를 깊게 눌러썼음에도 김식은 나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어둠이 밀려가고 점차 환한 태양의 빛이 조금씩 보태지는 그 길에서 김식은 불쑥 말을 했다.

 

“니가 넘지 말라고 그어 놓은 선 말이야.”

 

예상치 못한 시간에 예상치 못한 김식의 말이었다.

 

“너가 딱 여기까지만 알려줬잖아. ”

 

김식의 말투가 또 삐딱했다.

잔뜩 뒤틀려 나를 공격하는, 대치였다.

“ 씨바 집 뒤쪽에 방이 있을 걸 어떻게 알아? 지들만 앞문에 살고. 싹 다 밀어버려야 해.”

 

 

이런 말장난을 할 상태가 아니였다.

그냥…비켜가고 싶었다.

 

“내 선은 여기까지라 이거지?”

 

예쁜 대문과 단단한 현관문이 보이는 딱 그 위치에 김식이 버티고 서 있었다.

기운이 없어 손을 들어 훠이훠이 저었다. 비키라고.

 

이른 새벽 아무도 없는 길에 둘이 마주하고 섰다.

단단한 두 다리로 화를 안고 서 있는 김식이 마주 보고 섰다.

허기진 배를 붙잡고 간신히 지탱하고 선 나는 겨우 마주했다.

 

갑자기 김식이 내 쪽으로 몸을 낮추며 다가왔다. 반보 정도 뒤로 물러서자 김식이 바짝 다가와 내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

 

“좀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꼬추도 보여줬고 말이야.”

 

난 간신히 단단히 버티고 섰다.

 

“게다가 난 너 안으로 들어간 적 있는데… 너 여친 보다는 내가 더 가까운 거 아닌가? 거의 한 몸이었는데. 선 따위가 어딨어? “

 

“미친 놈.”

 

 

나는 화가 났다.

그런데 김식도 화가 나 있었다.

 

“그날은… 그냥 날 버린거야. 너네 남자들한테는 그런 거 별거 아니잖아. ”

 

거만하게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한푼어치의 무게도 의미도 없었다고 당당히 가슴을 펴고 그렇게 말했다.

가만히 김식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서 불이 번쩍 지나간 것 같기도 했다.

 

 

“그 쪼끄만 머리는 뭐가 그렇게 꼬이고 복잡해?”

 

나도 숨을 몰아쉬며 가만히 쳐다보았다. 길바닥 위에서 고작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난 니 여친처럼 똥마려운 개새끼처럼 빙빙 돌면서 신호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어. 나는 안 봐줘.”

 

무섭고 단호한 어투로 김식이 말했다.

울컥하고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니가 뭔데? ”

 

나는 기어코 김식에게 그 말을 하고 말았다.

 

“니가 뭔데 나를 봐줘? 니가 뭔데? 왜 멋대로 상복을 입어? 니가 뭔데? ”

안간힘을 다해, 몸 안에 남은 모든 기운을 짜내어 그 말을 하고 말았다.

니가 뭔데? 감히… 니가 뭔데?

보고 싶지 않았다.

김식의 눈동자 안에 나를 향한 동정이 있을까봐 보고 싶지 않았다.

 

“다 부서진 주제에 날만 바짝 세우고…쎈척 하기는”


툭하고 후드를 눌러쓴 머리에 김식이 손을 올렸다.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작은 먼지 만큼의 동정도 없었다.

 

“뻐대지 말고 그냥 밥부터 먹어.”


삐딱하게 서서 김식이 말했다.

 

“ 뭐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김식이 돌아섰다.

세워둔 오토바이 위에 훌쩍 올라탔다. 조용한 골목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 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밀려나는 새벽길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짧은 시간의 새벽이 끝나고 서서히 아침이 찾아왔다. 좀 더 환해진 길 위에 사람이 하나 둘씩 스쳐 지나기 시작했다.


마음이 여러 개로 쪼개졌다.

울화통이 터질 것 같기도 하고, 화가 치밀기도 하고, 억울함도 조금 있었다.

화는 내가 내야하는데 오히려 더 화를 내고 갔다.

게다가 내 속을 뒤집어 놓은 주제에 밥이나 먹으라니….

함부로 넘어온 것이 용서가 안 되는데 다시 함부로 또 넘어왔다.

 

옆집과 연결된 좁고 긴 담장을 지나, 뒷집과 닿은 낮은 담벼락 아래 시든 잡초가 밟힌 작은 흙바닥을 지나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나올 때는 알지 못했던 내방 창문 아래 뜻밖의 것을 발견했다.


누가 가져다 놨는지 가운데 구멍이 나 있는 시멘트 블록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누군가가 저기 앉았던 흔적이 역력한 자리가 못내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내 방문 앞에 손잡이가 달린 플라스틱 통에 딱 맞춰 뚝배기 그릇이 들어있다. 그 옆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 갈색 보리차가 들어있는 페트병.

이동 중 흔들려도 쏟아지지 않도록 정성껏 맞춰놓은 그 통을 바라보았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문 앞에 앉아 플라스틱 통을 열고 보리차가 든 페트병을 꺼냈다.

한동안 물도 마시지 않은 몸에 촉촉한 수분이 들어왔다. 한 모금을 마시자 다시 한 모금이 아쉬웠고 또 한모금을 마시자 다시 한 컵의 물이 아쉬었다.

꿀꺽 꿀꺽

바짝 마른 입안에 침이 돌기 시작했다.

몸 안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죽었다.

그럼에도 나는 목이 말랐고 배가 고파왔다.

내 우주의 한쪽의 부서졌는데도 나는 목이 말랐고 배가 고팠다.

내 인생을 뒤틀어 놓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나는 목이 말랐다.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다 부서진 주제에… 쎈 척하기는.

김식의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내 꼬라지를 다시 확인했다.

뚝배기 안에 고소한 죽 냄새에 맹렬한 허기가 끓었다. 







꼬랑쥐-


오늘은 손빨래를 하다가

밤과 낮의 경계선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산책만 할것이 아니라

손빨래도 열심히 해야하나... 라고 잠깐 생각했습니다.



그냥 인경이에게

어떤 위로에는 이런 위로도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네요.




푱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