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투투둑.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가 맑고 경쾌했다.

열어놓은 통 창에서 비를 잔뜩 머금은 무거운 바람이 커튼을 흔들며 들어왔다. 화려하게 만개했던 벚꽃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봄바람에 하얀 눈송이처럼 떨어지던 꽃잎의 마지막이 비를 맞고 땅으로 처연하게 뚝뚝 떨어져 내렸다.

화려함은 짧고 강렬한 기억만 남겼다.

 

김식이 삼단 서랍장 하나를 구해놓았다. 거기에 여러 색깔의 여자양말이 잔뜩 들어있다. 내가 시장에서 사다 놓은 속옷상자와 작아져 못 입는 옷이라며 우기는 다양한 색상의 티셔츠가 삼단 서랍장 안에 당당히 들어있다.

김식의 옥탑방에 내 물건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아쉽네.”

 

멍하니 창밖을 보다 혼잣말이 나왔다.

삼인용 소파를 등받이를 하고 바닥에 앉아 비가 떨어지는 처마를 보고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무거운 전공 책을 봐야했지만 처마를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빗방울에 자꾸 시선이 갔다.

김식이 조금 이상해졌다.

아무도 없는 남의 집 후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읽듯 거창하게 제안한 이후 김식은 조금 이상해졌다.

“뭐라고?”

 

주방 쪽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던 김식이 숨소리 같던 내 말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아니.”

 

내가 시장에서 사온 고무줄 밴딩이 있는 격자무늬 반바지를 입은 김식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앉으라고 갖다 놨더니 등받이로 쓰는 거야?”

소파 역시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물건이 되었다.

 

소파에 앉지 않고 등에 대고 앉은 내 모습을 보고 김식이 이죽거렸다. 김식의 바지를 사러 갔다가 알록달록한 꽃무늬가 있는 작은 밍크 담요 하나를 사왔다. 나 역시 김식과 비슷한 무늬의 반바지를 입고 드러낸 맨 다리위에 그 담요를 덮고 앉아 있었다.

 

“뭐라 하지 않았어?”

 

김식은 그 잠옷 바지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다.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 온 그 바지를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입고 있던 바지를 훌렁 벗어내고 그 잠옷 바지를 입었다. 이렇게 좋아 할 줄 알았으면 하나 더 사올 걸 그랬나?

 

“별말 안했는데?”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길어진 머리에 김식은… 아무렇게나 앞머리에 삔을 꽂았다. 더운 여름 날 춘천 집 앞에서 내게서 뺏어 갔던 그 삔 이었다.

어디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자꾸 히죽거리는 김식이었다.

 

“못생겼어.”

 

삔을 꽂고는 당당하게 서 있지만 웃긴 꼬락서니를 보고 그때 김식이 내게 했던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나한테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지 않아?”

 

점점 뻔뻔해지고 있다.

처음 계단 강의실에서 뒤편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 알아? ’라고 차갑게 묻던 김식과 내 앞에서 치근거리는 김식이 같은 사람이라니.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조금씩 달라진다고 하지만 너무 극렬한 변화였다.

 

김식은 나의 고장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핑크색 맨투맨을 입혀주고, 이쁘게 생긴 남자애를 내 앞에 데려온 것과 저 우스꽝스러운 앞머리를 보면.

나는 방향이 틀렸다고 굳이 말하지 않았다.

김식은 내 고장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올려다보는 것이 목이 아파져 다시 창 밖을 보았다.

투둑 투둑 떨어지는 빗방울의 소리가 다시 느껴졌다.

내가 시선을 돌리자 김식이 내 시선 속으로 따라 들어왔다. 성큼 걸음을 옮겨 내 시야를 가로막고 섰다. 담요 안에 쌓인 내 발을 용케 찾아 꾸욱 발로 눌렀다.

담요를 사이에 두고 내 발과 김식의 커다란 발이 맞닿았다.

 

방금 전까지 나름 낭만적인 비오는 풍경 사이를 김식의 요란한 고무줄 반바지가 가로 막았다. 내 시선 높이에 딱 김식의 [별거처럼 느껴지고 있는] 꼬추 위치였다.

급하게 시선을 올려 김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냥 아깝다고 했어. 비 맞고 꽃 다 떨어질 거 같아서.”

“난 또. 이거 지고 나면 왕 벚꽃 필텐데…”

 

다시 발가락에 힘을 주어 내 발등을 꾹꾹 눌렀다. 내가 시선을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왕 벚꽃?”

“꽃잎이 조금 다르게 생겼는데 그 꽃도 거기 후원에 있어.”

 

김식이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예쁘겠네.”

 

나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특별한 이름까지 달고 있는 벚꽃이라면 특별히 더 예쁘겠지.

 

“벚꽃을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취향을 보면.”

 

김식이 내가 덮고 있는 진한 청색 바탕에 커다란 노란 꽃이 현란한 밍크 담요를 눈으로 가리켰다.

 

“어때서? 싸고 좋으면 취향인거지.”

 

처음 김식의 방에 들어섰을 때 느낀 것은 여러 사람의 취향이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여성적인 커튼과 묵직한 원목의 붙박이 옷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있는 커다란 매트리스 그 옆에 파티션처럼 공간을 분리하고 있는 비싸 보이는 체리목 책꽂이와 넓고 거창한 책상, 아주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주방과 식탁의자.

적어도 네 사람 이상? 아니 이젠 나까지 다섯 사람쯤?

거기에 싼 게 취향인 내 물건까지 끼어들어 이상한 방이 되어가고 있다.

 

“할머니가 겨울 끝났다고 싸게 가져가라고 했어.”

 

이 집안과는 너무 이질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또 김식이 피식피식 웃었다.

요즘 김식은 자주 웃었다. 삐딱하고 날선 눈매는 거의 사라지고 걸핏하면 키득거리고 큭큭 거리는 바보가 되었다. 어느 날은 내게 아양을 떨기라도 하듯 눈을 예쁘게 접어 웃기까지 한다.

 

“비 그치면 보러 갈래? 왕 벚꽃.”

“별로.”

“…왜? 좋아하는 거 같았는데?”

한껏 풀어져있던 김식의 얼굴이 잠깐 경직되었다.

 

“내꺼 아니잖아.”

 

김식이 내 옆에서 비켜섰다. 다시 시야에 빗물이 떨어지는 어두운 옥상이 나타났다. 다시 주방 쪽으로 가나 싶었는데 내 옆에 김식이 풀썩 앉았다.

밍크담요를 깔고 앉는 바람에 김식 쪽으로 몸이 스르르 기울었다.

김식이 빠르게 고개를 숙이더니 내 입술에 입술을 대고 꾹 눌렀다 떨어졌다.

나는 기울던 몸을 바로 했다. 어쩐지 옆에 앉은 김식의 체온이 신경 쓰였다.

 

요즘의 김식은 달달했다.

엄마의 수돗가에 지붕을 만들어준 그 날도 달고나를 먹은 것처럼 굴더니 이 집에 올 때마다 김식은 다정했다.

 

“그거도 너 줄까? ”

 

이렇게.

바본가? 라는 눈으로 김식을 쳐다보았다.

가만히 내 눈을 맞춘 김식이 또 피식거리고 웃는다.

 

“왜 언덕 제일 높은 곳에 있던 그 집도 준다고 하지?”

“그거도 줄게.”

 

김식이 다정한 목소리로 흔쾌히 말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자기 건가? 평범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하늘에 별도 달도 따주겠다는 허황된 약속을 낭만이라 착각하는 부류인가?

 

김식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면 김식이 제 정신을 차릴까 생각했다.

“별로. ”

“왜? 친일파였던 사람꺼라서?”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식이 다그치듯 물었다.

 

“친일파가 뭔 상관이야. 본적도 없는 사람인데. 그렇게 예쁜데 일 년에 두 번만 오픈 한다며? 치사해서 싫어. 선심 쓰는 거 같잖아.”

 

이번엔 김식이 나를 가만히 보았다.

“선심은 아닐거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서겠지.”

 

느린 말투였다. 마치 나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듯 했다.

김식이 창밖을 보며 손을 뻗어 내 목덜미에 손을 댔다. 따뜻한 체온이 맨 살갗에 닿았다.

 

“내 눈엔 노력으로 보였어. ”

“고작 두 번이?”

“그 후원이 잘 보이는 곳에 그 노인의 무덤이 있어. 죽어서 가진 게 고작 몇 평짜리 무덤이었어. ”

아주 오래전에 이 땅에서 사라진 사람에 대해서 김식이 느리게 말했다.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김식은 진지했고, 나는 의아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그 옆에 노인의 아들 무덤이 있어. 노인의 아들이 노인보다 먼저 죽어서 제 손으로 아들 무덤을 만들었대. 많은걸 욕심내다가 소중한 걸 잃은 거겠지.”

 

난 내 살갗에 닿은 김식의 손가락이 뜨거워 어깨가 움츠러지는 것을 참고 있었다.

 

“거긴…너무 화려하고 거창해. 그런 건 나하고 안 어울려. ”

 

뒷목을 간질이던 김식의 손가락이 딱 멈췄다.

 

“원래 내꺼 였던 것도 못 가졌는데….”

김식이 몸을 기울이더니 내 옆머리를 쿵하고 박았다.

 

“아야.”

“또 못 되게 말한다.”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눈치다.

나를 내려다보는 김식의 시선에서 다른 답을 해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그 날 밤 그 공간이, 하늘에 뜬 달도 바람까지 다 좋긴 했다.

 

“근데 뭘 자꾸 준대? 주려면 다 주던가? 이 집도. 언덕의 그 집도. 내가 갔던 병원도, 다 줘. 시장도 주고.”

 

나는 불퉁거리며 말했다.

 

“뭘 알고 말하는 거야?”

 

김식이 빙글 웃었다. 나를 보는 눈이 또 예쁘게 반달이 되었다.

 

“알지. 나중에 엄청 쪽팔릴지는 잘 알겠네. 진짜 내가 달라 할 때 빚쟁이 취급이나 하지 말아.”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진짜 받는다 했다.”

 

나를 빤히 들여다보는 김식의 시선이 따가웠다.

농담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이상해졌다.

김식은 여전히 진지했고, 나는 그런 김식이 낯설었다.

 

“근데. 넌 어떻게 잘 알아?”

“어릴 때 할머니 무릎에 누워 들었어. ”

 

내가 쳐다보고 있던 비가 떨어지는 처마를 김식도 나란히 쳐다보았다.

 

김식이 뭐라 말을 하려다 말았다. 곰곰이 뭔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말을 물으려는 것도 같고. 뭔가 중요한 얘기가 지나간 것도 같았는데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스무 살짜리 남자의 거창한 허세를 그냥 받아주기로 했다.

 

 

목덜미를 만지던 김식의 손이 귓불로 옮겨왔다.

김식은 이제 틈만 나면 나를 만지작거렸다. 정신을 차려보면 능숙하게 내 몸 어딘가와 자꾸만 닿아있다.

처마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저 김치찌개는 대체 어떻게 끓인 거야?”

“김치 넣고, 물 넣고?”

 

밥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엄마 김치를 가져왔다. 서경언니랑 살 때는 그렇게 끓여도 대충 맛이 난 것 같았는데 맛이 엉망이었나 보다.

 

“나중에 라면스프도 넣으면 먹을 만 해 .”

“대충?”

“돼지고기도 많이 넣었는데… 그렇게 이상해?”

 

빈집에 들어와 밥도 해놓고 찌개도 기껏 끓였는데 맛을 본 김식이 어떻게든 살려보겠다며 나를 밀어내고 주방을 차지했다.

 

“저렇게 맛없게 끓이기도 힘들겠다. 어머니 김치 맛있던데. ”

“음식은 큰 언니가 잘했는데… 서경언니랑 나랑은 쫌 못해. 그래도 그럭저럭 언니가 해줄 땐 먹을 만 했어.”

“밥 먹자.”

 

김식이 일어섰다.

느리게 몸을 펴는 김식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쳐다보았다. 자꾸만 내 시선이 [별거처럼 느껴지는] 김식의 중심부로 쏠려 몰래 마른 침을 삼켰다.

나도 몸을 일으켰다. 담요를 들추자 선뜻한 비를 품은 바람이 드러난 맨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타타타탁.

김식이 능숙하게 한손으로 계란을 깨고 젓가락으로 야무지게 흰자와 노른자를 풀었다. 작은 도마에 썰어 놓은 파를 한 줌 넣었다. 가스불 위에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풀어놓은 계란 물을 부었다. 달아오른 기름에 계란이 익자 뒤집게와 젓가락을 이용해 익은 계란을 돌돌 말았다.

 

“엄청 잘하네.”

“급식소 봉사가면 한 번 만들면 백 개도 넘게 만들어. ”

 

동글게 말린 계란을 한쪽으로 밀고 다시 계란물을 후라이팬에 붓는 김식을 몰래 쳐다보았다.

 

“냉장고에 오이소박이 있어.”

 

식탁을 닦고 수저를 놓자 김식이 내게 말했다.

마치 소꿉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냉장고에 든 통을 꺼내고 누구의 취향인지 알 수는 없지만 김식의 주방에 있는 하얀 접시를 꺼냈다. 통의 두껑을 열자 상큼한 오이향과 잘 익은 부추향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접시에 담다가 봄을 가득 담은 오이 하나를 때어 입안에 넣었다. 아삭하고 씹는데 김식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어느새 예쁘게 말린 계란말이가 완성되었다.

 

“밥은 내가 풀게.”

 

김식의 손은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작은 전기밥솥에 미리 밥을 해두었다. 나는 어설픈 주부역할, 김식은 능숙한 주부역할을 하는 소꿉놀이다.

 

김치찌개를 놓을 자리에 받침대를 놓자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나는 찌개 냄비를 김식이 올려놓았다. 냄비 두껑을 열자 김이 한가득 올라왔다.

 

“어때?”

 

어느새 썰어놓은 두부가 먹음직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식당에서 파는 것처럼 제법 모양새도 냄새도 났다.

 

얼른 내 의자에 가서 앉았다. 밥주세요 라는 눈빛으로 김식을 쳐다보았다.

국자를 들고 작은 접시에 내 몫의 찌개를 떠주는 김식이 칭찬을 기대하며 내게 물었다. 대답을 기대하는 김식 때문에 급하게 수저로 국물을 떠서 후후 불어 식혔다.

 

“하아. 뜨거. …맛있다.”

 

내 말이 만족스러운지 김식이 기분 좋게 씨익 웃었다.

무엇을 손댔는지 내가 끓였을 때보다 훨씬 국물도 진하고 간도 맞았다. 김식이 내 앞 의자에 앉았다. 식탁 아래에서 김식이 또 내 발위에 자신의 발을 걸쳐놓았다.

“오이 김치도 건물주 그분이 하신거야?”

“잘 먹는 아들이 있대. ”

 

뜨거운 계란말이도 맛있고 상큼한 오이소박이도 맛있고 진하게 우러난 국물에 돼지고기도 맛있었다. 김식과 있을 때마다 맛있는 것을 먹게 되는 것 같았다. 아주 평범한 일상 으로 김식이 스며 들어와 있었다.

“덕분에 나도 감사히 먹네. ”

 

특별한 음식이 아니었고, 누구나 다 가진 소박한 시간 속으로 김식이 어느새 녹아들어있었다.

 

“ 말 나온 김에 나 군대 가면 여기 들어와 살아. 아예 지금 이사 오면 더 좋고.”

 

군대를 가는구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잘 말린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 먹었다. 분명 간도 맞고 예쁘게 말렸는데 스펀지를 씹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런 걸 집주인 허락도 없이 너가 막 결정해? ”

“시장도 가깝고. 김치찌개 끓인 거 보니 나 없으면 딱 굶어죽겠던데. ”

“현주가 가끔씩 맛있는 거 잘 챙겨주거든. 학식도 열심히 먹고 있고.”

 

다시 김식이 내 발을 꾹꾹 눌렀다.

 

“너 여친 요즘 바쁜 거 같던데?”

 

늘 예쁘고 단정한 부잣집 딸처럼 입고 다디던 현주가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만 입고 열혈 전사가 되어있다. 첫사랑의 열병에 빠져있는 중이었다. 현주 얘기만 나오면 잔뜩 풀어졌던 김식의 눈매가 뾰족해진다.

“여기 학교랑 쫌 멀어지는데….”

 

김식을 약 올리려 한마디 더 보탰다.

 

“이 집 비면 사촌형이 또 들어올 지도 몰라. 잘 지키고 있어야해.”

“먼저 여기서 살았던? 오히려 잘 된 거 아냐? ”

 

어느새 비어버린 내 접시에 김식이 다시 찌개를 덜어주었다.

 

“난 누가 내꺼에 손대는 거 싫단 말야.”

“난 괜찮고?”

“포함관계로 설명하자면 난 너꺼지. 나랑 자자고 너가 먼저 꼬셨잖아. ”

 

김식이 벌컥 소리쳤다. 그것도 모르냐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찌개 국물이 목에 탁 걸렸다. 매운 기가 기도로 넘어간 듯 캑캑 거리며 기침을 했다.

 

급하게 물 잔을 잡으려 손을 내밀었다. 쿨럭 쿨럭.

 

“그리고 넌 너랑 나랑 여기서 온갖 짓을 하고 다녔는데 그걸 남한테 맡기고 싶냐?”

허둥대다 순간 젓가락이 식탁 아래로 툭 떨어졌다.

쿨럭, 쿨럭.

나는 빨리 식탁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장난처럼 시작한 대꾸에 김식이 거침없이 직진을 했다. 쿨럭쿨럭.

바닥에 떨어진 젓가락 하나를 주우려다 식탁 아래에 테이프로 붙여놓은 콘돔을 보았다.

 

젓가락을 줍고 올라올 시간이 되어도 올라오지 않는 내가 궁금한지 김식도 식탁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식탁아래에서 눈이 딱 마주쳤다. 쪼그려 앉은 나와 식탁 아래로 내려다 보는 김식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내가 식탁 아래에서 무엇을 찾아냈는지 김식도 알아챘다.

 

“내가 말했잖아. 식탁에도 붙여놨다고. 사촌형이 여기서 지내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삐딱하게 김식이 불퉁거렸다.

내가 먼저 식탁 아래를 빠져나와 의자로 올라왔다.

허리를 펴자마자 김식도 느리게 식탁위로 올라왔다.

눈이 마주쳤다. 김식의 눈동자에 다시 뜨거운 열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나 역시도 아랫배가 간지러웠다.

 

“귀찮은 놈들이 쫌 있는데… 그 놈들이 제법 괜찮은 소리를 하더라고. 조식 먹고 김식 먹고. 중식 먹고 김식 먹고. 석식 먹고 김식 먹고.”

 

나를 빤히 쳐다보며 김식이 말했다.

 

“ 다 먹었으면 이제 김식 타임인데… . 어때?”

 

김식이 말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김식은 나를 좋아한다.

아랫배에서 이상한 열기가, 간지러움이 올랐다.

김식이 빠르게 식탁위에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겼다.

눈 속에 욕망이 벌써 어른거렸다.

밤마다 무엇을 상상했는지 그 상상을 실현하기 위해 김식은 망설이지 않았다. 아직 입안에 김치찌개의 여운이 남아있는데 김식은 또다시 직진했다.

 

식탁아래 붙여놓았던 은색 콘돔을 찢었다.

내내 기분 좋게 입고 다니던 내가 사준 바지가 훌렁 아래로 떨어졌다.

이미 우뚝 서 존재감을 뚜렷이 보이는 성기를 나는 쳐다보았다. 내 안에 음란한 무언가가 시선을 묶었다. 저게 뭐라고.

내가 입고 있던 김식과 비슷한 무늬의 잠옷도 거침없이 흘러내렸다. 그 안에 손바닥만한 속옷도 김식의 손에 바닥에 툭 떨어졌다.

둘다 웃옷은 입은 상태에서 아래만 벌거숭이가 되었다.

평온한 저녁시간에서 갑자기 들끓는 욕망의 시간으로 삽시간에 변해버렸다.

 

 

“인경아.”

 

식탁을 붙잡은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등 뒤에서 내 귓가에 속삭이는 김식의 목소리에 귀가 녹아버릴것만 같았다. 밥을 먹기 위한 용도의 식탁이 이런 식으로 사용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의 상상은 빈곤했고, 김식의 상상은 지나치게 풍성했다.

 

“인경아.”

 

거친 호흡과 뜨거운 입김에 내 귓가에서 쏟아졌다.

내 숨도 거칠어졌다. 저릿한 전기가 손가락 끝을 간질이고 등줄기를 관통했다.

거칠게 밀어붙이는 힘에 다시 식탁 모서리를 잡았다.

저녁 시간 내내 달달하게 굴더니 김식은 정복을 나선 기사처럼 거침없이 나를 몰아댔다.

 

“으흣.”

 

웃옷을 밀어올리며 김식의 손이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김식의 욕망이, 나의 욕망이 거침없이 부딪혔다.

 

등 뒤에서 김식이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나의 팔을 잡아 몸을 돌려세웠다. 김식의 얼굴이 또렷이 내 시야로 드러났다.

다시 김식이 내 안으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 왔다.

그 채로 나를 안아 들더니 식탁 의자에 앉았다.

 

“너가 해봐.”

 

쉰 소리로 김식이 명령했다.

나는 김식의 말을 이해했다.

소파도, 식탁도, 식탁의자도.

김식과 내가 머문 이 공간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안되겠구나.

곧 내가 이집으로 들어오겠구나 그 생각을 했다.

 

김식이 내 어깨를 살짝 물었다.

 

“으흣.”

 

서툴게 허리를 움직이다 다시 낮은 신음을 흘렸다.

김식이 다시 내 귓불을 물었다.

 

김식은 나를 좋아한다. 내 이름을 부르는 뜨거운 목소리에서도 알 수 있었다.

 

김식은 모른다.

내가 얼마나 비틀리고 못됐는지.

내가 무엇을 버리고 살았는지.

내가 얼마나 나쁜 년인지… 김식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