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혹은 3-2




 탱크는 무슨….

전차부대가 내 몸을 밟고 지나간 것 같았다.

나는 점령당했다.

 

처음 시작은 내게 주도권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 조차도 관심이 없었던 내 몸 구석구석을 김식 앞에 다 드러냈다. 결국 주도권을 가져간 것은 김식이었다. 나는 가끔 허둥거렸고, 내내 낯선 감각에 당황했다. 다행히 김식이 통창 앞을 환하게 밝히던 불을 꺼두었기에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자세를 감당할 수 있었다.

 

“인경아.”

 

김식은 내게 시원한 물 한잔을 또 마시게 했다. 이제 끝난 건가? 하는 순간 다시 또 내게 덤벼 들었다.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내게 했던 그 말을 고스란히 행동으로 돌려주었다.

통창 앞 소파 앞에서 밀리고 밀려 어느새 매트리스 자리까지 밀려 올라왔다. 별 희한한 자세로 김식은 나를 밀어붙였다.

마지막으로 매트리스 자리로 김식이 건네준 시원한 물을 마시고 기절할 듯 까무룩 잠이 들었다.

 

“조인경.”

 

내 귓가에 바짝 내고 내 이름을 부르던 뜨겁고 음란한 소리가 아직도 내 안에 남아 피를 타고 떠돌아 다니는 것 같았다.

 

“인경.”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깜빡깜빡이다 겨우 눈을 떴다. 환한 불빛이 먼저 눈을 찔렀다.

다시 깜빡 눈을 감았다 뜨자 김식의 얼굴이 코 앞에 나타났다.

 

“…왜?”

 

설마 또 하자는 건 아니겠지? 이젠 손가락 하나 들 힘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같이 벚꽃 보고 싶었다면서?”

 

김식은 아주 상쾌하고 만족한 표정으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일어 나 봐.”

 

아직 발가벗은 상태였다. 이불아래 찐덕한 맨 몸이 퍼뜩 생각이 났다.

 

“지금? 몇 신데?”

“열두시 좀 안됐어.”

 

김식이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하아…”

 

깊은 한숨이 먼저 나왔다.

김식은 아직 힘이 남아 도는 것처럼 생생했다.

 

“내 가방 좀….”

 

나를 향해 눈을 이쁘게 접어 방긋 웃더니 김식은 가볍게 일어나 내 가방을 들고왔다.

 

“좀 씻어도 되지? 몸이 찐덕거려.”

 

겨우겨우 상체를 일으켜 앉아 가방을 받았다.

 

“내가 침 발라 놔서 그래.”

 

정복지를 무혈 입성한 김식은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활짝 펴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번 전투에서 패한 것은 내가 맞다. 쾌락주의자라는 이름까지 붙어버린 조인경이 되어버렸다.

 

“너네 남자들은 이런 걸 배워? ”

 

울컥 치밀어 올라 쏘아 부치 듯 말했다.

 

“너도 내가 처음이었다면서? 어떻게?…”

 

그 뒤로 더 말을 보태고 싶었다. 어떻게 능란했냐고? 아니면 요상한 것을 요구했냐고? 아니면 내 온몸에 흔적을 새기 듯 물고 빨았냐고?

 

“교과서가 있지.”

 

피식 김식이 웃으며 말했다.

 

“어떤 마녀 같은 여자가 나랑 비슷한 주인공을 만들어 아주 자세한 묘사로 써놓은 글이 있더라구. ”

“별 미친….”

“처음엔 죽여 버릴까 했는데 나름 요긴하게 쓰기도 했고… ”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 소파 옆 협탁에서 꺼낸 콘돔이 생각이 났다. 매트리스 위에서도. 바지 뒷주머니에서도. 마치 보물찾기하듯 구석구석에서 손 가까운 곳에서 콘돔을 꺼내던 지난 밤이 생각났다.

 

“너… 콘돔 말이야?”

내가 소파 옆 작은 협탁을 눈으로 쳐다보자 김식이 말귀를 알아채고 아하 하고 웃었다.

 

“밤마다 상상했지. 너랑 어디서 어떻게 할까 하고. 식탁아래에도 붙여놨는데… 지금 할래?”

 

다시 또 말문이 막혔다.

“정말 별…”

“쾌락이라며? ”

 

자신만만한 김식의 얄미운 얼굴을 한 대 때려줄까 했다.

 

가방을 열고 깊숙이 밀어 넣었던 까만 비닐봉지를 꺼냈다. 김식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내가 하는 냥을 지켜보았다.

 

“필요할거 같아서.”

 

세 개가 나란히 들어있는 팬티 상자에서 하나를 꺼내자 김식이 빠르게 내 손에서 봉지째 채갔다.

 

“이건 뭐야?”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반바지를 꺼내들어 양손으로 펴보였다. 고무줄이 들어간 허리가 김식의 손에 한껏 늘어났다 줄었다.

 

“잠옷으로 쓰려고.”

“필요 없을 거 같긴 한데….”

 

일어서려다 흘러내리는 이불에 멈칫하는 나를 보고 김식이 피시시 웃었다.

 

“기특한 짓을 했네. 내꺼도 하나 사줘.”

 

입고 왔던 옷은 모두 통창 앞에 내던져 있어 가지러 갈 수 없었다. 잠깐 망설였다. 환한 불빛 아래 김식은 당당히 걸었지 않았나?

“화장실까지 데려다 줄까?”

“필요 없거든.”

 

대뜸 외치고는 벌떡 일어섰다. 내 등 뒤로 김식의 뜨거운 시선이 노골적인 욕망이 고스란히 따라왔다.

 

“욕실에도 콘돔 몇 개 있다.”

 

김식의 목소리에 더 빠르게 욕실을 향해 걸은 후 욕실 문을 소리 나게 쾅 닫아 버렸다.

 

뜨거운 물로 빠르게 씻었다.

얼굴이 자꾸만 달아올라 거울 속에 비치는 내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거울 옆 수납장 안에 투명 테이프로 붙여놓은 콘돔 세 개를 찾아내고는 황망하게 잠시 서있었다. 이상한 교과서의 내용이 궁금하기도 했고 김식의 상상력이 낯간지럽기도 했다.

찐득한 쾌락의 흔적이 빠르게 씻겼다.

새 속옷을 꿰어 입고 수건으로 앞가슴만 가린 채 욕실문을 열었다. 깊은 밤 시간에 집안에 따뜻한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주방 쪽에 있던 김식이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촉촉하게 젖어있는 나를, 앞가슴을 겨우 가리고 있던 나를 김식이 내려다보고는 픽 하고 웃어버렸다.

단숨에 가슴을 가리고 있던 수건을 채갔다.

선뜻한 한기가 맨 피부에 와 닿았다. 김식은 내가 어깨를 웅크리기도 전에 내게서 채간 수건으로 내 몸을 꼼꼼히 닦아주기 시작했다. 미처 닦지 못한 등 뒤도 무릎 아래에도 빠르게 물기를 닦아 주었다.

 

풀석. 젖은 수건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리곤 식탁 의자 쪽에 미리 올려두었던 옷가지를 가져와 내 머리위로 씌워 주었다. 햇볕 냄새가 나는 하얀색 반팔 티셔츠를 빠르게 입혀 주었다. 그리고 다시 옷가지 하나를 내 머리위로 또 씌웠다.

 

“손.”

 

김식이 능숙하게 나에게 옷을 입혔다. 내 팔 길이에 적당하게 맞는 핑크색 맨투맨 티셔츠였다.

 

“핑크네.”

 

내 온전한 기억이 있는 동안 꽃 잎을 닮은 핑크색 옷은 처음이었다. 낮에 만난 피아노 원장의 핑크색 니트가 떠올랐다.

 

“그거 알아? 옛날 영국에서는 어린 남자애들은 핑크색을 입었다는데… ”

 

이번엔 김식이 바지를 가져왔다.

 

“오른 발 들어 봐.”

 

김식이 시키는 대로 다리를 하나씩 집어넣었다. 허리까지 올리고 지퍼를 올려주고 단추를 채운 후 한 발 물러서 삐딱하게 서서 내 옷차림을 검사했다.

 

“좀 큰가?”

다시 내게 다가와 바짓단을 작게 접어주었다. 엄마가 새 옷을 사오면 내게 입혀주고 바지 길이를 재주던 것처럼 다정했다.

 

“나 중학교 때 입던 거. ”

 

김식이 바짓단을 접어주는 동안 발가락만 괜히 꼬물거렸다.

 

“그때는 자고 나면 클 때라.”

“그때 옷을 아직도 갖고 있어?”

“남자는 핑크지. 한번 밖에 못 입어서 짜증났었는데 …”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김식이 내 머리를 툭툭하고 건드렸다.

 

“대충 맞네. 밥 먹자.”

 

찌릿하고 잠깐 두통이 밀려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김식이 입혀준 옷을 입었다. 김식은 내가 이 집에 오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자꾸만 미리 준비해 놓은 것들을 내놓았다.

 

“늦었으니깐 가볍게 먹자.”

 

내가 낮에 시장에서 사온 손가락 김밥과 따뜻한 계란국이 식탁위에 차려져 있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따듯한 국 냄새에 갑자기 허기가 졌다.

“나 양말을 안 산 것 같아. ”

 

김밥 하나를 집어 먹다 말했다. 드러난 발을 꼬물거리다 신고 온 양말 밖에 없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식탁 아래로 내 맨발을 내려다보던 김식이 불쑥 발을 뻗어 내 발을 지긋이 눌렀다.

 

“내가 사줄게. 작아진 옷도 많이 갖다 놨는데 아예 그거 너 써. 계속 짐이 늘어날 거 같은데… ”

 

김식은 이제까지보다 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 눈빛엔 거창한 만족감이 번득였다.

 

 

◆◇◆

 

 

 

늦은 밤에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다.

 

“꽉 잡아.”

 

내게 헬멧을 씌워주고 꼼꼼하게 겉옷을 여며주고 지퍼까지 올려주었다.

오랜만에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 김식의 허리를 감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출발하려던 오토바이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아 내 몸이 김식쪽으로 확 쏠렸다.

 

“꼭 잡으라고.”

 

김식의 웃옷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는 단단히 허리를 잡았다. 갑자기 허리를 추어 올리던 김식의 야한 몸짓이 떠올라 시선을 먼 쪽으로 돌렸다.

 

“간다.”

 

김식의 등에 바짝 얼굴을 기대였다.

4월의 선선한 밤바람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이 든 자정이 넘은 시간, 거리에 오가는 차도 줄어든 시간에 자유롭게 김식은 오토바이를 운전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체 그저 등 뒤에 매달려 빠르게 뒤쪽으로 밀려가는 거리의 가로수를 쳐다보았다.

 

대략 십 오분 정도 갔을 무렵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오밀조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간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처럼 오르막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오르막의 느낌이 조금 달랐다.

 

내가 사는 곳은 넓은 곳에서 밀리고 밀려 높은 곳으로 올라온 거라면, 이곳은 처음부터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런 느낌이었다. 우선 담장이 지나치게 높고 뾰족했다. 아무나 들이지 않겠다는 듯 거대한 선을 담장으로 그어놓은 것 같았다.

 

쪼개고 쪼개어 많은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들어가게 만든 내가 사는 동네와는 달랐다. 너르고 넓게 고요한 성안에 공간을 최대한 확보한 높고 커다란 위용 있는 모습의 대문이 이따금씩 나타났다.

대문 하나에 넓은 공원 하나가 있는 듯 넓고 거대한 집.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집 그러나 집 안에서는 밖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권력의 집.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오토바이가 속도를 늦추더니 천천히 멈췄다.

 

조심스럽게 김식을 껴안고 있던 팔을 풀고 뒷자리에서 내렸다. 바닥에 내린 순간 저릿하고 근육통이 내달았다. 급하게 오토바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김식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

“어.”

 

허리를 펴고는 헬멧을 벗었다.

예쁜 정원을 가진 안쪽 집안에서 싸한 밤바람과 진한 꽃향기가 밀려왔다.

 

“여기서 쫌 걸어야 해.”

 

오토바이에서 내리고 헬멧을 벗은 김식이 내 옆에 바짝 다가와 섰다.내 손에서 헬멧을 채가 오토바이에 자신이 벗은 헬멧 옆에 나란히 걸었다.

 

“걸을 수 있지? ”

“그럼.”

 

허리를 곧게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몸 안 깊숙이 허벅지 안쪽의 지근지근한 근육통은 무시했다. 억센 뼈마디로 그렇게 밀어붙였으면서….

 

김식이 내 손을 감아왔다. 내 손 하나가 다 들어갈 정도로 큰 손이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손가락으로 전해졌다.

아무도 지나지 않은 높은 담장이 있는 길가를 둘이서 걸었다.

 

“예전에 이 지역에 아주 유명한 친일파 집안이 살았었대.”

 

뜬금없이 김식이 말을 꺼냈다.

 

“이 지역 가장 높은 곳에 집을 두고….”

 

그러다 문득 더 이상 대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길고 긴 담장만 이어지는 길이었다. 어쩌면 이 집이 이 길의 마지막 집인 것 같았다.

 

“아래로 보이는 모든 땅이 그 집 거였다지. ”

 

김식이 걸음을 멈췄다.

 

“고개 돌려 봐.”

 

앞만 보고 걷던 방향에서 김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내가 지나왔던 모든 길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장 골목도 그 뒤쪽에 있던 아파트가 언덕 위에선 가깝게 보였다. 김식이 살고 있던 옥탑이 있는 건물도 내가 서 있는 방향 끝에 가장 마지막으로 전철역이 보였다.

 

“눈에 보이는 게 다? ”

“아마도. 시선이 닿지 않는 쪽까지도 계속 갖고 싶었을거야.”

 

양쪽으로 키 높이를 재듯 서 있는 높다란 빌딩 건물 사이로 마지막 마지노선을 방어하듯 내가 다녀왔던 병원이 점처럼 서 있었다.

 

내가 지나왔던 언덕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새롭게 아파트를 짓고 있는 넓은 공사현장과 키가 큰 크레인 불빛도 눈에 들어왔다.

“엄청난 욕심쟁이였겠지.”

 

도시의 불빛 아래 놓인 가장 높은 곳에 앉아있던 권력자의 시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번 손에 들어 온건 절대 손에서 놓지 않았을 걸?”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 모든 지역을 한 손에 갖고 있었을 권력자라니. 친일파가 되어 이 땅을 모두 가진 것인지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친일파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김식의 말대로 엄청난 욕심쟁이일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랑은 상관없지.

으쓱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이쪽이야.”

 

가로등 불빛이 겨우 미치는 어두운 언덕 사이로 김식이 나를 이끌고 걸었다.

포장된 도로가 거의 끝나고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어두운 길 사이로 키 작은 담장이 나타났다. 겨우 일 미터 남짓한 높이의 담장.

 

김식이 간단하게 그 담장을 올라섰다. 그리곤 나를 끌어 올렸다. 나도 그리 어렵지 않게 담장에 올라섰다. 내 손을 놓고는 훌쩍 김식이 그 담을 넘어섰다. 바깥쪽보다 담 안쪽이 좀더 높이가 높은 것 같았다.

김식이 담 아래에서 내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근육통 때문에 잠깐 망설였다.

 

“앉아봐.”

 

김식의 말대로 무릎을 굽히자 김식이 내 허리를 잡아 담장 아래로 내려주었다.

발 아래 푹신한 풀밭이 느껴졌다.

 

다시 김식이 내 손을 잡았다. 앞을 가린 커다란 나무를 천천히 돌았다.

 

고작 작은 담 하나만 넘었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나무 하나를 돌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오래된 세월과 고난을 이긴 휘고 굽은 근사한 소나무 사이에 아주 커다란 정말 커다란 벚꽃 나무가 은은한 조명을 켜 놓은 듯 환하게 서 있었다.

“와아.”

 

낮에 햇살아래에서 본 벚꽃보다 흐린 달빛아래 드러난 벚꽃이 몇 배나 더 아름다웠다.

 

“예뻐.”

 

키 작은 예쁜 조명들이 반짝이는 이곳은 누군가가 정성을 다해 가꾼 듯 인위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이쪽으로 와.”

 

김식에게 손이 잡힌 채로 걸었다.

 

“여기 들어오면 안 될 것 같아.”

 

김식의 손에 끌려 걸음을 옮기면서도 눈앞에 드러난 근사한 풍경에 홀렸다. 마치 거인의 아름다운 정원에 몰래 들어온 꼬마 아이가 된 듯 심장이 두근거렸다.

 

소나무와 그 사이에 당당하게 자란 전등을 켜 놓은 듯 한 벚꽃나무 사이를 자박자박 발소리를 죽여 가며 걸었다. 어쩐지 들키면 안될 것 같은 마음에 조심해서 걸었다.

 

“여기 어딘데?”

 

동네 가운데에 휴식처 같기도 하고 공원 같기도 한 커다란 정원이었다.

그 가운데 지붕이 있는 조그마한 정자가 나왔다. 김식은 거리낌 없이 그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흐린 달빛과 키 작은 조명등 밖에 없는 낯선 곳에서 김식은 주저함이 없었다.

 

“이 마을을 다 가졌던 그 친일파의 후원.”

“막 들어와도 돼?”

“여기 벚꽃 필 때면 개방해주는 곳이야. ”

 

별거 아닌 듯 김식이 툭 말했다.

정자 끄트머리에 겨우 엉덩이를 붙이며 앉았다. 남의 집에 초대받지 않고 들어온 것처럼 어색했다. 숨소리조차 조심조심했다.

나와는 다른 곳, 내가 있으면 안 될 곳을 몰래 훔쳐보는 듯 작은 죄책감도 생길정도로 너무 아름답고 특별한 곳 같았다.

“가을 단풍 질 때도 개방해.”

“넌 여기 어떻게 알았어?”

“어릴 때 부모님이랑 소풍 온 적 있어. 너가 앉은 여기서 김밥 먹었지. ”

 

어린 김식이 이곳을 뛰어다니다 김밥 하나씩 입에 물고 다시 뛰어다니는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개방 안할 땐 가끔씩 동네 애들이랑 담 넘어 몰래 들어와 보기도 하고.”

 

김식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나는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데….

 

“너 그럼 이 동네에서 자란거야?”

“난 주로 시장 통에서 자랐어. 할머니가 거기서 가게를 하셨거든.”

 

하얀 벚꽃 잎이 간간히 떨어진 근사하게 굽은 소나무를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낯선 꽃을, 김식이 데려온 이상한 정원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낮에 들었던 피아노 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지금 혼자 나와 살아?”

“쫓겨났지.”

 

나는 벚꽃을 보고 김식은 팔을 뒤로 하고 느긋이 앉아 나를 쳐다보았다.

 

“왜?”

“스무 살이 넘었으니까. 넌 더 어릴 때부터 따로 살았다면서?”

 

당연한 질문을 왜 하냐는 듯 김식은 당당했다.

 

“어린 남자애들은 승부욕이 뇌를 지배하지. 무조건 이기고 싶거든. 고집부리고 욕심내고 다 이기고 싶지. 최초로 깨지는 게 아버진데…엄마를 놓고 말이야. 내 꺼인 줄 알고 태어났는데 알고 보니 엄마는 아버지꺼란 말이야.”

 

갑자기 김식이 꺼낸 말에 고개를 돌려 김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김식이 곧은 시선을 나를 쳐다보았다.

어둠과 옅은 빛 사이에서 김식의 시선은 거리낌이 없었다. 욕망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시선 속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무엇이 있었다.

 

“그 뒤로 한 번도 진 적 없어.… 뭐든.”

 

난 뭔 소리야? 하는 듯 눈으로 물었다.

 

“너가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난 절대로 그만 둘 생각이 없어. ”

 

거창하게 김식은 그렇게 말했다.

거침없이 내가 그어놓은 경계선 안으로 한발 더 들어왔다.


“난 질 생각이 없다고. ”

 

밤하늘 서쪽하늘에 걸친 반달의 빛이 김식의 얼굴을 비쳤다. 깊은 밤 안의 공기 안에서도 김식은 당당하게 빛났다. 조명처럼 빛나는 벚꽃 잎처럼.

 

“내꺼는 놓을 생각이 없다고. 너가 먼저 놓겠다고 하기 전까지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 빛나는 눈동자를 피할 수 없었다.

대신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지끈하고 두통이, 아니 심장 한구석이 조여 오는 듯 저릿한 통증이 왔다.

 

사람 관계에도 관성이 있다. 일단 시작이 된 관계에는 어떤 방향으로든 힘을 받고 움직인다. 김식과 나와의 이름을 갖기 못한 어떤 관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관성을 갖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