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님의 "오래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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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가슴에 피멍이 질 만큼 아프게 하고,  
혹한의 추위보다 더 시리게도 하지만
그건 가족이라서 더 아프고 더 시린거야.

사람의 배는 밥이 채우지만, 가슴은 가족이 채우는 거란다.
쓰러질 듯 위태로울 때 버팀목이 되어주는 건 가족이란다.
돈도 명예도 사회적 지위도 아니야.

사람은 가슴이 허하면 살수가 없단다.
외로움에 지레 지쳐 생기가 빠져나가지.

가슴을 채우렴.
추운 겨울에도 춥지 않을 만큼 화롯불처럼 은근한 열기로 데워 줄 가족을 가지렴.
사랑하는 내 아이야!


           ... 건호의 일기장 한 귀퉁이에 쓰여진 이 근종 씨의 글



( 아내의 사랑을 얻어 행복하게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지금, )

이제 세상의 반을 얻었다. 나머지 반은 내 아이들을 위해 남겨둔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사람의 배는 밥이 채우지만, 가슴은 가족이 채우는 거라는...

                  ... 이 건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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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호...

그녀가 왜 자신과 결혼 하려는 거냐고 내게 묻는다.
"내 통제에서 벗어났으니까. 이제까지 한번도 내가 통제하지 못한 상황은 없었어. 무엇이든."


사랑하는 순간 바보가 된다 했던가...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마음에 담은 순간부터 오로지 직진할 수 밖에 없었다.



진규...

사랑과 동경은 분명 다른 감정이다.

내 스스로 그녀에게 사랑이 아니라 말한다.
한없이 우러러보는 동경, 우리는 딱 거기까지야. 그 이상은 아니었노라고..

그녀에게만은 영웅처럼 보이고 싶었나보다. 아직도 여전히......



현주...

그가 왜 자신과 결혼 하려는 거냐고 내게 묻는다.
"좋은 사람 같아서요."


그녀에게 있어 진규는, 희망과 동시에 열정 그 자체였었다.
어느날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 그는 내게 오래된 열병처럼 기억되어 있다.
마치 '사랑'인 것처럼...

그녀에게 있어 건호는, 가훈 같은 남자였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사랑'일리가 없다... 그런데.....

첫눈 오는 날, 눈을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추위에 곱은 손으로 하얀 눈뭉치를 건네주던 것도, 난방조차 되지 않은 차 속에 꼼꼼히 담요를 덮어 여며주던 그 성실한 손도..
모두 첫사랑 진규가 아닌 곁에 있는 남편이었던 것을.

내세우진 읺았지만 몰래몰래 살뜰히 챙겨 주는 그 마음은 어느새 나를 길들였습니다.......


진눈깨비 같은 남자와 겨울을 질색하는 여자...

뭐든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마하 속도로 움직이는 듯한 남자와 형광등인 듯 한 발짝씩 늦어버리는 여자...

그저 반한 죄다, 그녀를 가슴에 담은 이상 망설임없이 직진을 택한 남자와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감정의 주인이 누구인지조차 가려내기 어려워 헷갈려 죽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여자...

그렇게도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만나 결혼을 하고 비로소 사랑을 배워가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이 아니었나보다.

사랑은 아니라고...
좋은 사람 같다고, 그 성실한 느낌에 선택했다 생각했는데... 사랑이었나 보다.

자칫 놓칠 뻔한 인연, 사랑과 동경 그 사이 어디쯤에 잃었던 자신의 연인을 찾아 함께 한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일런지요.

등장 인물들의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하는 모습을 엿보는 것도 꽤나 즐거운 일이었지만, 더불어 서로에 의해서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듯한 모습도 보기 좋았지 않나 싶습니다.

건호는, 예측 가능했던 일상들이 부서지기도 하고 비록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흘려보내야 하긴 했지만 결국 아내가 주는 사랑으로 아버지 말씀이 맞았노라 행복하게 답할 수 있었고...

심장부근에 가시가 하나 박힌 것 같은 존재가 미몽과 같은 진규의 열정인지, 안도감이 드는 성실한 손에 담겨나오는 건호의 다정함인지조차도 헷갈려 해 읽는 내내 제 마음을 상당히 졸이게 했던 우리의 여주인공, 현주...

그녀는, 오랜 기억의 편린이 만들어 낸 환상에서 차츰 깨어나서 남편의 마음이 자신에게 지극하게 와닿아 있었음을.
오랫동안 묶혀두었던 화구를 꺼내어 거실 한 켠에 이젤을 세워두고 그림이란 게 애초에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란 걸 비로소 알게 되었으며...
( 정말이지 느릿느릿 현주가 막판에 무던히도 잰걸음으로 건호를 따라잡기 열심이어서 다행이었다는.^^ )

진규는, 현주와의 짧은 해후를 통해 냉엄한 현실과 허무하리만큼 흐지부지 되었던 꿈의 몰락으로 인해 잃어버리고 있었던 열정, 자신이 꿈꾸는 이상에 향한 '전사'로써의 모습을 찾게 되었으니까요.

마지막 티비 화면 속에 비치던 진규의 모습을 보며 결국 그는 어쩜 언제나 '영웅'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진실을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주인공들과 함께 제 마음을 쥐락펴락했던 매력만점의 조연 캐릭터들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거 같아요.

첫번째가 현주의 어머니...  

입버릇처럼 첫째가 시집을 잘 가야 동생들도 잘 간다더라... 현주의 정신을 쏙 빼놓기 일쑤이고,  아무개 집은 어쩐다느니.. 누구네 집엔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느니...

돈이 주는 가치와 지위, 그것을 적당히 이용할 줄도 알고 지극히 현실적이고 적당히 속물 근성이 밴, 평범한 듯 자주 보게 되는 우리네 어머님이셨습니다.

현주에게 이 대리에게 김치 갖다 줄래 아니면 선 볼래... 등등 반은 어거지 같지만 도저히 반대할 수 없게끔 만들어 놓고 안되면 내가 언제.. 시침 뚝 때시기도 하고 잘되면 것봐라는 듯 뿌듯하게 만면의 웃음을 지으시는 모습을 보노라면 너무 너무 귀여우셨어요.

무수한 후보들을 제치고 당연 '귀여운 여인'으로 명하는 바입니다.


두번째가 건호의 아버지 존재만큼이나 제 심장 한쪽을 콕콕 찌르던 조인경씨...

양현주 이야기와 더불어 조인경 이야기는 저에겐 오랜 기다림이어도 좋다, 언젠간 이 세상의 빛을 보기 희망하는 인물입니다.

딸만 넷이라서 딸딸딸딸... 경운기라며 농담하다가 그래서 아버진 밖에서 아들을 낳아 왔노라 별 거 아닌 양 말하는,
짐짓 씩씩하고 야무져 보이지만 그 속내는 누구보다 상처가 가득할 것만 같은 그녀.

인경이 이야기도 조만간 꼭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 옆구리 찌르기 대장, 저 미루.. 미리미리 더피용님 옆구리를 찌르기 찜해두는 거예요.^^


마지막 세번째가 건호의 아버지, 이 근종 어르신.

문득 모 드라마 속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려졌습니다.

둘째는 맨날 엄마는 밥 밖에 모른다고, 누가 밥만 먹고 사느냐.. 투덜거리기 일쑤지만 그럼에도 아랑곳않고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입버릇처럼 말씀을 하시죠.

밖에 나가서도 어디 멀리에 있든.. 춥고 배고파지면 낮이건 밤이건 언제든 이 엄마한테 찾아오너라.. 내 다른 건 몰라도 항시 따뜻한 밥은 배부르게 먹여주마... 하면서 말이죠.

아마도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그 '따뜻한 밥'이란 건 비단 밥 한끼뿐만 아니라 내 주위엔 언제나 든든한 가족이 버티고 있다 힘내라하는 가족간의 정도 더불어 포함되어 있는 걸 겁니다.

내 자식이 배곯지 않고.. 정에 굶주리지 않고... 항상 내자식들 몸도 마음도 넉넉하길 바라는 심정,
그게 바로 부모님의 모습이겠죠.


<플러스>에서의 지연이 어려운 난관을 끝까지 참아낼 수 있었던 버팀목 같은 존재가 이모부였다면,
<오래된 거짓말>의 건호가 마음이 고단한 일이 있더라도 힘을 낼 수 있었던 건 바로 아버지라는 존재였던 것처럼요.

그들이 주인공 곁을 지켜주므로써 그른 길로 새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길로 직진할 수 있었는지도요.

그 때문에 이근종 어르신의 살아 생전 바른 모습과 너무나 조용히 가신 애틋한 모습을 보며 제 가슴이 더욱 진득하게 뭉근해졌지도 모르겠습니다.

금방 금방 알아채진 못해 잠시 아쉬웠다해도 결코 늦지는 않게 건호와 현주는 이제 서로에게 충만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자신의 가족에게 사랑을 베푸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겁니다.
자신들의 부모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죠...

마지막으로 이 세상 모든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세지인 듯한 건호의 말을 대신으로 감상글을 마칠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처 이별연습을 하기도전에 그렇게 떠나보내드려야 했던 아버지에 대한 마음 한 켠의 안타까움을 더해 건호의 심정에 공감하면서...


사랑합니다...

몇 번이고 이 말이 하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네요...

많이 사랑합니다......




덧붙임.하나..


혹시 그거 아시나요...

'...한 주제에' 란 말이 꽤 자주 등장했다는 사실을...^^

전에 마이니님의 '로맨스 흥부뎐' 리뷰 쓸때 '...했건만'이란 말이 반복되더라 하는 글을 썼던 적이 있는데, 이번 책을 읽다보니 마치 음률을 타듯 저 말이 자주 나온다는 걸 알고 새로운 무엇을 발견한 양 저혼자 싱긋~



덧붙임.둘..

알고 보면 더 재밌다...!?

<수수께끼풀기>, <플러스>와 <오래된 거짓말>의 공통 분모는...

'돌은 움직이지 않으려 얼마나 애쓰고 있을까?'라는 사뭇 철학적인 느낌이 나는 카페...
그런 카페 이름만큼이나 괴짜 같은 '돌까'의 사장님...
언제나처럼 용감할 수수의 지연이...

그리고... 숨어 있는 또 한 사람,

<플러스>의 비사...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 드라마,
한 나라의 대통령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존재인 황회장과 독대하던 요구르트 아주머니를 기억하십니까...

<오래된 거짓말>에서... 현주의 지갑을 들고 진규가 모처럼 호사를 하듯 따뜻한 잠을 청했던 빨간 뿔테 안경의 여관 주인을 기억하시나요...

그녀는 과연 누~구~란~ 말~이~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