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와 야수(2)/야수는 '까불이'?  

안녕하세요. 약속대로 하루만에 다시 뵙습니다. 오늘은 이야기를 마무리할게요.
'미녀와 야수' 뮤지컬은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인 2시간 반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채웠습니다. 물론 뮤지컬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이미지는 영화에서 본 것과 아주 흡사합니다. '벨을 갖고 싶어 몸살이 난 사나이' 가스통, 가스통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졸졸 따라 다니는 아첨꾼 르푸는 정말 영화 속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으로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뤼미에르와 콕스워스, 폿츠 부인 등 마법에 걸린 성 사람들의 연기도 뛰어나 재미를 더했습니다.

벨 역을 맡은 조정은 씨는 뮤지컬 배우로서는 신인급이지만, 그 동안의 노력이 배어나는 노래와 연기로 무난하게 역할을 소화했습니다. 야수 역을 맡은 현광원 씨는 이탈리아에서 활동 중인 성악가 출신인 만큼, 뛰어난 노래 솜씨로 관객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야수의 연기에 대해서는, 노래만큼의 만족감을 느끼기 어려웠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야수의 절절한 고뇌


야수는 주인공이니만큼 가장 중요한 인물이면서, 가장 연기하기 힘든 역이기도 합니다. 잘생긴 용모에, 권력까지,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왕자는 남에 대한 배려라고는 몰랐던 차가운 마음 때문에 요정의 마법에 걸려 야수가 됐습니다. 하지만 벨을 만나기 전까지 야수는 왜 요정이 자신을 야수로 만들었는지를 아직 잘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저 바깥 세상에 대한 '벽'을 쌓아두고 은둔의 세월을 보냈을 뿐입니다. 사나운 짐승에게 쫓겨 성으로 피신한 벨의 아버지를 감옥에 처넣은 것을 보면 말이지요.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 않으면 영원히 야수로 남아있게 된다는 요정의 벌은, 마음 속에 사랑이 없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닌 야수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웅변합니다. 벨을 알기 전의 야수는 그렇게 '명실상부한 야수'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마법에 걸린 성 사람들에게 '사물화'가 점점 진행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야수는 벨을 만나서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변하게 됩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방을 위해 노력하고, 인내할 것도 많아진다는 사실을, 때로는 커다란 희생까지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법이 풀릴 수도 있다는 희망으로 벨에게 사랑을 고백하려 했던 그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벨을 차마 성에 더 붙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벨을 놓아줍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 벨을 떠나보내는 것이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었지만, 이는 곧 그가 영원히 야수로 남아있어야 하는 절망적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현광원 씨의 연기는 야수의 이런 내면 심리를 묘사하는 데는 미흡했던 것 같습니다. 절절한 고뇌보다는 가볍고 조급한 어린애 같은 측면이 두드러졌습니다. '벨을 사랑하기에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장면에서도, 야수의 절절한 고뇌는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현광원 씨의 연기는 노래할 때는 괜찮다가도, 대사만 시작하면 목소리가 어딘지 붕 떠있는 것 같고 불안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저에게는 뮤지컬 전반부가 후반부보다 더 재미있었습니다.


철없는 어린애 같은 야수


무엇보다도 저는 공연을 보는 내내 야수가 까불거리는 게 불만이었습니다. 현광원 씨의 야수는 '의식적으로' 가볍고 경쾌하게 가려고 애쓰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덕분에 웃기는 많이 웃었지만 말이죠. 야수가 왜 저렇게 카리스마가 없을까. 제가 기대했던 야수는 이렇게 가벼운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야수가 코믹하고 귀엽게 묘사되는 장면들이 여럿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무게감이 느껴지는 캐릭터여야 할 것 같았습니다.

'미녀와 야수' 국내 제작팀에 물었더니, 디즈니의 연출자는 야수를 다소 가볍고 까불거리는 캐릭터로 설정했고, 그렇게 연기를 하도록 이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야수의 캐릭터를 놓고 국내 제작팀과 약간의 의견 차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 제가 추측해본 이유는 이렇습니다.

뮤지컬에는 정확한 야수의 나이가 나오지 않지만, 영화에는 '야수가 21살 생일이 되기 전까지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면 영원히 야수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즉 야수는 나이가 많아봤자 이제 21살의 생일을 앞둔 젊은이라는 것입니다.

젊고 잘생기고 무서운 것 없이 오만했던 왕자는, 아마도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이기도 했을 겁니다. 웬만한 일은 하인들에게 맡겨 처리하고, 자기 뜻대로 안되면 금세 성질을 부리며, 참을성 없는 어린애처럼 행동했을 겁니다. 그러니 무서운 모습의 야수로 변한 다음에도 철없는 성정은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벨을 만나 성숙해간다는 설정이죠.


까불이 야수 VS 무게있는 야수


하지만 이렇게 '까불거리는 야수'는 한국 관객들의 정서에는 그리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미녀와 야수' 영화의 DVD 타이틀을 보면, 한국어로 번역된 야수의 대사에서 뮤지컬과는 차이가 납니다. 영화 속의 야수는 상당히 '무게 있는 말투'를 사용합니다. 특히 한국어 더빙 판을 들어보면 이런 무게감이 더합니다. 뮤지컬의 대사를 100퍼센트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합니다만, 굳이비교해 보자면 대략 이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수가 벨에게 도서관을 선사하는 장면)

뮤지컬: "마음에 들어? 그럼 다 네 거야!"

영화: "마음에 드오? 그렇다면 모두 가지시오(한글 더빙) 또는 모두 당신 거요(영어 대사의 한글 자막)"

영어에서는 '다 네 거야'나, '이제 모두 당신 거요'나 모두 'It's yours'로 별 차이가 없습니다만, 한국어로는 엄청난 차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국어 녹음을 한 성우의 목소리도 상당히 중후합니다. 이렇게 '점잖은 야수'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 관객들에게 '발랄하고 까불거리는 야수'의 어린애 같은 반말투의 대사와 목소리,연기는 상당히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배우의 이미지와 부조화

또 애니메이션을 미리 보지 않은 관객들에게도 '까불이' 야수는 어색해 보일 것 같습니다. 야수 역을 맡은 현광원 씨는 이미지 자체가 '가벼움'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원래 갖고 있는 목소리도 그렇고, 용모에서 풍기는 느낌도 그렇습니다. 연출 팀이 설정한 캐릭터와 배우 개인의 이미지가 잘 맞지 않는 셈입니다.

이런 배우 개인의 이미지 차이까지 극복하기에는 현광원 씨의 연기력이 아직은 좀 딸리는 것 같았습니다. '까불이 야수'도 무난하게 연기하고, 벨을 사랑하면서 성숙해 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혹시 현광원 씨 본인부터 연출 팀이 설정한 야수의 캐릭터에 '마음 속으로부터' 동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어색한 연기가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요.

저는 뮤지컬의 개막 공연을 봤기 때문에, 장기 공연의 특성상 공연이 거듭될수록 부족한 부분이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오페라의 유령' 때도 개막 초기에는 유령 역을 맡은 윤영석 씨의 연기에 좀 실망했다가, 두 달 뒤 같은 공연을 보고 '괄목상대'라는 말을 저절로 떠올리게 하는 그의 변신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이미 현광원 씨의 연기도 상당히 많이 좋아졌을 겁니다.

하지만 야수의 캐릭터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야수는 까불거려야 할까요. 무게가 있어야 할까요. '까불이' 야수라는 캐릭터 설정에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현광원 씨가 연기하는 야수라면, 지금보다는 좀 더 무게 있게 묘사되는 편이 낫다는 데 한 표 던지겠습니다.

'표준화된 제작 시스템', 그러나....

디즈니의 제작 시스템은 어찌 보면 '제작 공정이 표준화된 공장'과도 같은 것이어서, 해외 어느 나라에 가든지 비슷한 품질의 제품을 생산해 냅니다. 그래서 전세계 곳곳에서 각국의 언어로 공연되더라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는 것과 비슷한 작품이 나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똑같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더라도 출연 배우가 바뀔 때마다 작품의 느낌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하물며 영어가 아닌 언어로, 그 나라 배우들의 연기로 공연되는 경우라면 더 많이 달라지는 게 당연한 일 아닐까요. 그러니 까불이 야수라도, 한국에서는 조금 더 점잖아지는 일이 가능하다는 얘깁니다. 그러고 보니, 외국 작품을 번역해 공연한다는 것은, 참 미묘하고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은 작업인 것 같습니다.

'야수'의 연기에 대한 불만을 되짚어가다가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이렇게 나름의 불만을 토로한 현재로서도 이 뮤지컬은 충분히 볼 만하다는 것입니다. 또다시 불만을 늘어놓게 되더라도, 다시 한번 '미녀와 야수'의 마법과 같은 세계에 빠져들고 싶습니다.


**쓰다 보니 또 이렇게 길어졌는데, 너무 지루한 얘기가 아니었나 걱정입니다. 오늘은 바람이 꽤 선선하네요. 얼마 남지 않은 8월 마무리 잘하시고 행복한 가을 맞이하세요.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가족과 함께 뮤지컬 한편을 보시는것은 여름이 가기전에 말입니다
아이들과 볼수 있는 공연이네요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