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오백 년의 역사의 흐름을 타고 온 아름다움.


서울에 개인적인 볼일도 있고 해서 반쯤은 억지로 시간을 맞춰 갔던 전시회였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고 장소는 협소해서(실제 이층가옥의 크기임. 대충 각 30평 정도의 1,2층으로 나눠져 있었어요.) 땀을 뻘뻘 흘렸지만, 너무 좋았어요. 볼 때는 정신없이 봤고, 나오고 나서는 새록새록 아쉬운 시간이었습니다.
집에 와서 아이에게 보고서를 쓰게 하면서 약간 놀랐어요. 제가 있었던 그 순간, 그 좁은 장소에 엄청난 국보급 보물들이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거든요. 일순간 현기증이...;;

어쨌든, 서예 등에는 무지한 결과로 제일 눈에 들어왔던 것은 회화 작품들이었어요. 신윤복이나 겸재 정선의 그림은 교과서를 통해 눈에 익었던 것들이었지만 직접 보니 그 필치에서 감동의 물결이 절로 줄줄줄...T.T

신윤복의 그림의 여주;들이 틀어 올린 구름 같은 머리채는 몇 백 년이 지나도 어찌 그리 푸른 기가 돌도록 검은지. 또한, 굽이굽이 돌아가는 정선의 금강산은 어느 것은 날카롭고 당당하며 어떤 것은 둥글고 우아해서 그 변화가 얼마나 사람의 눈을 홀리는지...

심사정의 담백한 화풍이나 김득신의 유쾌하고 맛깔스러운 그림도 좋았구요, 미처 몰랐던 다른 화가들의 그림도 일품이더군요. 굉장히 인상깊었던 화가는 이명욱이란 분으로, ‘어초문답’이라는 그림은 도록의 사진과 실물이 정말로 정말로 천지 차이입니다. 그 강렬한 느낌이란 실로 말할 수가 없어요. 불행히도 이 분의 그림은 전해지는 게 이 하나뿐이라고 합니다.

그 밖에도 김홍도의 꾀꼬리 소리를 듣는 그림의 절묘한 시선이라든지, 밤에 생황을 부는 그림의 쓸쓸함(혹시 단원 본인의 심회를 그린 건 아닌지^^;), 정선과 사임당의 풀 그림과... 하여간 그림은 어느 하나 명작이 아닌 게 없더라구요.

그리고 도자기. 교과서에 청자 얘기만 나오면 단골로 나오던 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실물로 봤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원숭이형 연적과 기린형 향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데(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뭐 어쩌겠냐만은요;;), 기린형 향로는 아마 만들어질 때부터 어느 당대 부호나 유수의 귀족 가문의 서재에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리고 희고 소박한 백자 두 점(소박해도 국보인...;). 역시 뭔가 조형적인 느낌이 드는 청자와는 달리, 백자는 바탕에 그림을 그린, 그러니까 도자기를 화폭으로 한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전시품 중에서 제일 오래된 것들은 역시 삼국(혹은 신라)과 고려의 불상들인데요, 천 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찬란하더군요. 인상 깊었던 것은 ‘금동삼존불람’이라고 해서 세 분 부처님을 모신 절을 조그맣게 만들어놓은 것인데, 집채를 마치 뚜껑처럼 벗겨 놓고 안의 부처님상과 분리해놔서 잘 볼 수 있도록 해놨더라구요.
그 지붕의 섬세한 표현이라든지 절(가람)을 금동으로 만든 특이함 등등이 과연 국보급이란 느낌.

서예에서 가장 박력 있었던 것은 역시 추사 김정희의 필체. 늘 미술 책에 나오던 안평대군의 글씨도, 또 다른 서예품들도 제가 문외한이라 아, 잘 썼구나... 정도여서 좀 죄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건 선조의 유일한 공주셨던 정명공주의 필체였는데, 화정(華政)이라고 단 두 글자였지만 몹시 큰 대작이어서 이 분이 대군이었으면 어쨌을까 싶었다가 나중에 정보를 찾아보고 조금 실망했었어요. 하하;


시간과 공간적인 여유가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이라는 소리를 몇 번이고 내뱉게 만드는 전시회였습니다. 앞으로 생애 몇 번이나 이런 전시회를 볼 수 있을까요. 에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