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또한 가장 내가 원하는 로맨스 소설의 모습은 ‘현실에서 살짝 비껴난 꿈’이라고 자주 생각했다. 또 자주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계속 그렇게 두고 있었으면서 아마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한 일주일 사이에 오랫동안 못 보던-혹은 안 보던- 로맨스 소설을 몰아서 읽었다. 10권이 좀 넘는 책들이었지만 이런 저런 장점과 단점들을 냉정하게 생각하던 나를 어느 새 순수한 독자의 입장으로 돌아가게 만든 것은 서너 권. 그 중에 인생미학과 실연세탁소가 있었다.

이 두 책의 감상을 몰아서 쓰게 된 것은 게으름 탓도 있고, 두 책을 읽게 된 시기가 겹친 탓도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딱 감상을 쓰기 좋으리라고 생각되어서다. 전혀 다르면서도 내 마음 속에 미친 감정의 파장은 비슷했으니까.

먼저, 이 감상문^^;의 제목을 꿈 같은 현실과 현실 같은 꿈이라고 했는데, 굳이 따지자면 전자는 실연세탁소, 후자는 인생미학일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반대일 수도 있겠지만.

꿈 같은 현실을 그려서 나를 행복하게 해준 실연세탁소는 실연으로 인해 다니던 직장을 박차고 나와 세탁소 운영자;가 된 소근과 국내 유수의 백댄서 팀을 이끄는 댄서 겸 안무가 은우의 얘기다.
다정다감해 금방 은우를 마음에 들여놓지만 실연으로 인해 자신의 마음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소근과 늘 쿨한 연애만을 해오다가 처음 느낀 감정이라는 이유로 쉽게 사랑임을 깨닫지 못하는 은우가 서로에게 다가서는 발걸음이 밝고 귀엽고 수줍게 드러나 있다. 한 마디로 베리 베리 큐트하지만, 또 그게 마냥 만화나 애니메이션 같지는 않다.

그것은 글에서 묻어나는 생활의 편린들, 그리고 살아있는 대화체에서 나오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실연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두고 나와 버린 소근의 얘기는 어느 정도 현실적이지만 은우의 얘기는 아니다. 로맨스 소설의 남주답게 잘생기고 춤 잘 추고 멋진 은우, 집안도 재벌씩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잘 나가는 집안의 아들인 그는 꿈속의 남자이다. 그가 있는 연예계도 현실의 독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꿈의 세계임은 마찬가지.

하지만 실연세탁소는 이러한 꿈은 남자인 은우가 현실의 여자인 소근에게 끌려감으로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글에서의 무게감도 역시 소근에게 더 있다고 나는 믿는다. 제목이 왜 실연세탁소겠는가.)

소근이 만들어주는 맛있는 가정식들(근데 사실 이것도 진짜 현실에서는 꿈이긴 하다. 특히 나 같은 사람에겐.;;)이나 소근이 자주 앉고 눕는 세탁소 앞 평상, 그녀가 화가 나서 찾아가는 실내 야구장, 은우와 소근이 마주치는 시발점이 되는 소근의 세탁소... 이런 친근한 배경들과 익숙한 소재들이 실연세탁소의 주된 분위기를 만든다.

거기에 더하여 그 소재들을 차분히 정감 있게 풀어나가는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문장. 너무 튀는 것보다는 씹으면 고소한 누룽지 같은 실감나는 대화들. 그래서 이 글이 내겐 꿈 같은 현실이 될 수 있었던 거다.

실연세탁소에 비하면, 인생미학은 현실 같은 꿈이었다. 가슴을 적시고 아련한 느낌을 주는 꿈. 그렇지만 글 전체에 넘치는 따뜻한 온기 덕분에 현실이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라게 되는 꿈 말이다.

인생미학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주제’다. 실연세탁소에서 좋았던 부분이 소재나 문장 같은 재료들이었는데, 인생미학은 그 주제가 글을 안정적으로 감싸고 있다는 것이 사실 개인적으로는 거의 충격적이었다. 연재 때도 알고는 있었지만 한 권의 책으로 읽으니 그런 기분이 더 강했는데, 로맨스 소설에서는 주제가 이렇게 두드러지는 책은 정말 없다고 (사견이지만;)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톨스토이를 매우 좋아하는 내겐 그 점이 상당히 필이 꽂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인생미학은 문장(혹은 문체)에서 봐도 실연세탁소와 상당히 다르다. 실연세탁소에서는 짧고, 간결하고 알기 쉬운 단어들을 썼다. 생활용어^^;를 알차게 엮어서 만든 느낌이다.
하지만 인생미학은 문장이 길다. 혹은 물리적인 문장 자체는 짧아도 문장의 이미지가 갖는 진동이 길다고나 할까. 단어 사용도 색다르다. 뭐랄까, 옛날의 英詩영시를 떠올리게 하는 리듬감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단어 배열 같은 것은 정이원님의 특징인데, 그것이 여주인 영의 느낌을 한층 더 희고 우아하게 해준다. 문장 덕분에 더욱 이 글의 속성이 꿈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현실은 가혹하다. 장애를 갖고 있고, 전과자 아버지에 고아나 다름없는 겨우 스물이 갓 넘은 여주가 아무리 소리 없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고 한들 병원 원장인 부친을 가진 지적이고 세련된, 사회적인 지위(이교는 겨우 서른 남짓에 팀장이다. 그것도 단순한 중소기업은 아닌 듯 하다. 중국에 사원 아파트도 있는 기업이니.)도 있는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소근과 은우의 결합도 다소 비현실적이긴 하나 이교와 영만큼은 아니다. 절대 꿈이다.

하지만 인생미학의 내용은 현실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꿈이다. 인물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따뜻한 주제(딱딱하지만, 작품을 만든 작가의 뜻을 부르는 가장 익숙한 단어니까 쓴다;) 때문이다. 꼭 독자가 영의 입장에 자신을 겹치지 않아도 충분히 영은 사랑스럽다. 작가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고, 그렇게 따뜻하게 보고 있으니까.

물론 이교도 그렇고, 이 글의 모든 인물들이 다 그렇다. 심지어 둘을 갈라놓게 만드는 악역(?)인 해민이나 영을 내치려고 하는 아버지조차 작가는 독자가 용서할 수 있게 장치해 놓았다. 이글에서 제일 악역을 하고 있는 것은 영의 장애와 그녀의 병이다. 독자는 마음껏 그 악역을 미워하고 완전 소멸되기를 원하면서도 악인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꿈처럼 행복한 책읽기를 할 수 있다.  

읽으면서, 좋은 책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선택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독자의 취향이다. 하지만 내게는 단순히 취향뿐 아니라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주어서 더 좋은 책들이었다.

모든 것이 다 함께 어우러지는 글을 쓰게 만드는 것은, 일관성과 개연성을 탐구하며 열심히 쓰고 또 쓰는 손일까 아니면 꿈꾸는 머리와 가슴일까. 그것이 참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