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추월색에게 깊이 공감하지만, 그러나 인간 김 윤서에게는 공감할 수 없었던 영화.-
(일단 먼저, 이 평은 상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적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미리 보시지 않은 분에게는 상당한 스포일러가 들어 있다는 것도요. ^^;)
사건 위주의 영화를 볼 때면 관객에 따라 장면장면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곤 합니다. 어느 해석이 맞는지는 영화 관계자의 말을 들어야 알겠지만, 개인적으로 전 그러한 여러 가지 해석에 나름대로 가치가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서나 영화관람처럼 어떤 창작물, 특히 대중문화의 산물을 해석하는 행위에는 향유자(독자, 영화관람객)의 시각이 퍽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소위 대중문화 평론가나 기타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평을 그닥 중요하게는 생각하지 않는 편입니다. 특히 어려운 말 많이 쓰는 사람의 평일수록 더 그렇죠. ^^;) 따라서 제가 쓰는 이 글도 대충 그런 식으로 ‘한 관람객의 감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 ‘음란서생’은 굉장히 대중적인 영화, 혹은 대중을 의식하고 만들어진 영화라고 느꼈습니다. 그 제목부터가 그런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죠. 당대의 명 문장가를 주인공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약간의 지적 요소(?)들이 드러나긴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런 면이 더 대중적이라는 느낌이었어요. 현학이랄까요? 현대에서는 드러내놓은 싸구려는 잘 팔리지가 않으니까요. 최소한 문화계의 생산품은 그런 경향이 짙지 않을까 합니다.
게다가 음란에 대해서라면, 싸구려 음란은 이미 이 사회에서는 포르노라는 이름으로 넘치도록 팔리고 있죠.(잘 팔린 영화가 늘 그렇듯 좀 있으면 음란 서생을 모방한 야한 비디오가 나올 거란 예상이...; 제목은 ‘음란 선생’ 정도? --;;) 따라서 고급스럽고 경쾌한 분위기의 음란성이 이 영화의 목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윤서가 정빈에게 넘어가지 않은 이유도 아마 그런 것일 테죠. 음란하되, 무겁지 않고 지극히 세련되고 경쾌하게.
이 영화를 만드신 감독 분이 시나리오 작가였다고 들었는데, 문학과 관련된 기교면에서는 굉장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아마도 약간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보면 감동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영화일 듯해요.
또한 음란소설의 작가와 삽화가라는 인연으로 만들어지는 김 윤서와 이 광헌의 끈끈한 우정이라던가, 조 내관이나 정빈의 눈물겨운 애정 등도 굉장히 대중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요소라고 느꼈습니다.
남자 간의 의리, 고귀한 여인의 주인공에 대한 순수한 사랑, 오래도록 해바라기를 해온 이룰 수 없는 남자의 짝사랑...
영화나 소설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고전적인 소재지 않습니까? 잘못하면 시시할 수도 있는 흔한 소재를 연기자들이 잘 소화를 해내어서 저는 참 좋았어요. (솔직히 영화에서 호감을 느낀 인물은 이 광헌과 조 내관이었고, 동정표를 산 사람은 정빈이었음)
하지만 역시 주인공인 윤서에게는 호감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진지해서는 안 되는 영화의 의도(물론 제가 추측한)에 따르자면야 윤서는 그런 식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제 시선으로는 역시 윤서는 유기장이의 흑곡비사에 대한 언급대로 ‘젠 체 하는’ 인간이었으니까요.
현대로 치면 출판업자 쯤 될 유기장이는 윤서에게 색안경을 건네줍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작가란 원래 이런 것을 끼는 것’이라고 말해주죠. 윤서는 또 그것을 끼고 흐뭇해하구요.
저는 이 장면이 ‘음란서생’의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의 시각을 드러내어주는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서에 대한, 혹은 문학이나 문화에 대한 시각이죠. 뭐, 꼭 그분들의 문학관이나 영화관이라고는 말하는 것은 아니구요, 다만 대중영화로서 ‘음란서생’에서는 ‘작가’라는 인물을 그렇게 만들었죠. 색안경이란 한 겹 유리 너머로 사람들의 인생을 바라보는 인물로.
‘꿈에서 본 듯한 것을 현실감 있게 맛보게 해주는’ 능력을 가진 작가는 남달라야 한다, 그러니 그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인생에 살을 맞대는 것이 아니고 꿈꾸게 하는 것이라고 이 영화는 속삭이는 듯 했습니다. 그것은 작가로서의 권리이자 의무여서, 그 때문에 화를 당하기도 하고 행복하게 되기도 한다고.
실제로 영화에서 윤서는 대다수의 사람이 흔히 빠질 수 있는, 혹은 빠져야만 하는 정빈과의 사랑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랑을 작품을 위해 이용을 합니다. 그래서 사실을 알게 된 후의 분노한 정빈에 의해 고초를 겪죠.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정빈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그녀의 꿈을 사실처럼 속삭여줌으로써(이건 해석에 따라 다릅니다만, 저는 그렇게 봤어요. 정빈을 사랑했다는 윤서의 고백은 그의 글처럼 반 허구적인 거라고.) 그는 또 목숨을 구합니다.
장안을 들뜨게 하고 또한 목숨을 위태롭게 한 그의 글 ‘흑곡비사’와 마찬가지로, 정빈을 사랑했던 것처럼 말하는(그러나 고백 속에는 직접적으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윤서의 고백 또한 그의 작가 의식의 위대한;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로서는 훌륭하죠. 프로 의식이 철철 넘친달까요. 그러나 제가 아마 윤서였다면 정빈과 사랑에 빠지고, 그래서 작가의 본분을 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해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면 음란서생은 신파로 가는 거죠. 하하;;)
솔직히 윤서가 무슨 컴플렉스가 있어서 이렇게 꼬였다면 저는 그를 이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컴플렉스가 있긴 있죠. 소심하고 겁이 많다는 소문 등등), 하여간 성격적으로 이런 복합적인 인물은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 저는 그만 조연인 이 도사(이광헌)에게 빠져버렸습니다.
일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쌈;도 잘하고, 정치적으로는 적인 윤서를 친구로 받아들일 정도의 배포도 되고, 친구를 보살피는 마음까지 착실하니 이 아니 어여쁘겠습니까. 하하;
사실은 그림이 좀 된다면 문 내관의 성격이 더 저의 취향이었습니다만, 아무래도 문 내관은 너무 아저씨틱하게 생겼다는...;;
그리고... 무척 불쌍한 정빈. 하기야 문 내관과 임금님의 사랑을 몸에 겹도록 받은 그녀로서는 불평을 말할 수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윤서는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노란 환상을 품게 만들어주었으니, 남자 셋이 자신을 엄청 사모했다는데 뭐가 불만이겠습니까만. 그래도 윤서에게 속아서 저렇게 기뻐하고 또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구요. 작가 김윤서의 제일 가는 독자는 흑곡비사에 열광한 장안 여인네들이 아니라 바로 정빈, 그녀였을지도요.
주인공 윤서라는 인간에게 공감하지 못해서 별 한 개를 빼고, 약간 남성주의에 치우친 듯한 분위기 때문에 별 반 개를 뺀 음란서생은 제게는 별 세 개 반짜리 영화였습니다. 유기장이를 비롯한 출판사(?) 조연들의 열연 때문에 좀 더 더한다 해도 네 개가 될락 말락.
얼마 전 상당히 재밌게 본 ‘왕의 남자’는 확실히 별 네 개(공길 때문에 마이너스 별 하나;)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저는 세련됨보다는 투박한 진지 모드를 좀 더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