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나는 위태위태했다.
몸속이 독주로 가득 채워진 것처럼 일렁거리고, 투견이 된 마냥 무언가를 물어뜯고 싶기도 했다. 또는 나를 망가뜨리고 싶기도 했다. 세포 하나하나까지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듯 한 아주 예민한 그런 날이었다.
스무 살, 대학 신입생은 인생의 새로운 시대를 맞는 떨림과 설렘으로 가득한 시기라고 현주는 강조하듯 말했다. 성인이 되었으며 자유가 생겼으며 누군가를 사랑해도 되는 시기라고, 갑자기 온 세상이 핑크빛이 된 듯 신이 나서 말했다.
현주는 벌써 봄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듯 화사하고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나는 한겨울 북풍 한가운데에 혼자 서 있었다. 지난밤 난장 속에 다친 손이 욱씬 쑤셔왔다. 꿰맨 상처가 후끈후끈 뜨거웠다.
멀리서 현주가 보였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고 잠시 동안 연기를 할 거였다. 난 거짓말을 잘하니까.
오른손을 코트 주머니 속으로 깊게 쑤셔 넣었다.
정문 앞에 서 있는 현주가 나를 보자마자 손을 크게 흔들었다. 캠퍼스 안으로 줄줄이 들어가는 학생들 사이에 가만히 서 있는 현주는 단번에 눈에 띄었다. 지나가는 학생들 몇몇이 흘끔거리며 현주를 보고 갔다.
"빨리 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느릿느릿 걷는 내가 답답한 듯 현주는 폴짝폴짝 뛸 듯이 손을 흔들었다.
어깨를 덮는 머리길이에 얌전한 머리띠를 하고 까만색 정장 자켓에 무릎 위 댄디한 스커트까지 입은 현주는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공주님 같았다. 누가 봐도 새내기 같은 차림새다. 지나가는 남학생 몇몇이 힐끗거리고 스쳐가건만 본인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다. 평소처럼 다소 눈치가 없어 오늘 나의 상태를 놓쳐 주었으면 좋겠다.
.
"왜 이렇게 늦었어?"
하얗게 입김이 나오는 바깥에서 꽤 오래 기다렸는지 입술이 파랗게 얼어있다.
현주가 미리 와서 기다린 것이지 내가 늦은 것은 아니다.
"밥 먹고 나오느라고."
서경언니가 짐 챙기는 것을 괜찮은 척 돕다가 느리게 나왔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다정한 현주의 잔소리가 싫진 않지만 오늘은 최소한 만 받고 싶었다.
"머리 또 잘랐어? 옷은 또 그게 뭐고? 서경언니가 옷 사준다고 했다며?"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짧은 머리. 아무렇게나 주워 입은 청바지에 검은색 모직 코트 차림은 대학교에 놀러온 고등학생 정도로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춥지만 않으면 되지 뭐."
큰언니가 사준 예쁜 옷도 지난밤 난장에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나 너무 떨려. 애들하고 못 어울릴까봐 너무 걱정돼.”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아. ”
현주는 아마도 입학 선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새 것일 터였다.
현주가 내 팔짱을 끼고 바짝 붙었다. 현주는 나와 이런 식으로 걷는 걸 좋아한다. 키가 남자 평균키 정도 큰 나와 붙어 걸을 때면 폭 안기듯 내 팔짱을 끼었다. 그러면 뒷모습은 영락없는 일반적 연인의 모습과도 같아 고등학교 시절엔 둘이 사귄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도 돌기도 했다.
"어휴, 차갑다. 조 인경. “
현주의 새로 산 구두가 내 운동화 옆에서 햇살에 반짝반짝 빛난다. 둘이 나란히 인도를 따라 캠퍼스 안으로 들어섰다. 학교 안은 새 학기 답게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어 있긴 하지만 교내에 들어오는 차량은 통제 되는 듯 학생들은 도로를 가로질러 다니는 행위에 주저함이 없어 보였다. 교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통제와 질서를 벗어 난 듯 자유롭고 경쾌해 보였다.
부아아앙
등 뒤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새까만 오토바이 한 대가 휙 하고 가깝게 스쳐 지나갔다. 현주의 치맛자락이 바람에 휙 하니 흔들렸다.
“어맛!”
흔들리는 현주를 빠르게 안쪽으로 당겼다.
“괜찮아? ”
생각할 사이도 없이 이제껏 주머니 속에 잘 감춰져 있던 손을 빼 현주의 몸을 잡았다.
“저 미친…뭐야 위험하게.”
“야, 인경, 너 이 손 뭐야”
잠시 휘청이던 현주가 중심을 잡자마자 붕대를 감은 내 손을 두 손으로 잡아챘다.
“윽, ”
놀란 현주가 내 붕대 감긴 손을 잡아채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파? ”
손을 뻬내려 했지만 현주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손으로 내 손목을 더 꽉 잡았다.
“ 살짝 잡았는데도 아…파? ”
온 몸에 높은 전류가 흐르듯 저릿한 통증이 내달렸다.
귓전으로 부아앙 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신경이 곤두서 그 소음이 무척이나 거슬려 이마를 찌푸리고 말았다.
“ 어쩌다가 다친 거야? 응?”
넘어진 돌쟁이 아기한테 달려가는 엄마 같은 표정으로 현주가 나를, 내 손을 안타깝게 내려다보고 있다. 오 분 전까지만 해도 화사하고 세상이 행복해하던 현주의 표정이 구겨져 버렸다.
이런 표정은 내가 보고 싶던 표정이 아니다. 그저 오늘은 현주가 행복하도록 옆에 서 있기만 하려고 했는데……. 집을 나설 때 나에게 약속한 거짓말이었다.
“그냥… 넘어졌어.”
“어떻게 넘어졌길래? 속상해.”
“ 정말… 괜찮아. ”
현주가 내 손을 잡고 호호 입김을 불어댄다.
“고만해. 진통제도 맞았고, 약도 먹었어.”
“으이구, 내가 못살아.”
바람에 가벼운 꽃향기가 풍겨왔다.
어느새 숙녀 티를 내려는 모양인지 향수까지 뿌리고 나온 현주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왼손을 들어 현주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멀리서 보면 딱 연인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설핏 웃음이 났다.
단과대학별 신입생 O.T가 있는 날이다.
학교 안은 신입생들이 삼삼오오 신나는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먼저 끝나도 기다려야 해."
"알았어."
"점심도 꼭 나 만나서 같이 먹어 줘야 해."
"알았다고."
"나 아는 사람 하나도 없으면 어떻해?"
"조용하고 좋지 뭐.“
"하여간에 잔정 없기는……."
갈림길에서 현주는 다친 내 손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는 몇 번의 다짐을 하고 헤어졌다. 다친 이마를, 손톱이 할퀴고 지난 자리를 현주가 발견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현주를 만나 잠깐 풀어졌던 표정이 다시 단단해졌다. 잠깐의 연기는 끝났다. 나는 다시 나로 돌아왔다. 다시 머릿속에는 지난밤의 모든 상황이, 모든 언어가 되풀이 되었다.
계단 강의실은 대학생이 된다는 마음으로 들뜬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모여 설레는 마음이 소음으로 이어져 왁자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는 날카롭고 예민한 감각에 이명이 울릴 것 같았다.
되도록 주변에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조용히 구겨지듯 앉았다. 주목받지 않는 것이 좋았다. 할 수 만 있다면 세상 속에서 사라지고 싶기도 했다. 현주와 약속만 아니었다면 이깟 오리엔테이션 따윈 나오지도 않았다. 오늘은 여기 이곳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다한 느낌이었다.
“야, 저기. 김식이야 김식.”
"누구?"
뒷자리에서 여자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왔다. 그다지 조심스럽지 않은 목소리들이었다. 다소 흥분도 깃들어있는.
"미친 김식."
“미친 김식? 아아! …어디?”
“저기 비니 모자 쓴… “
"어디…어디? "
웅성 거리는 계단 강의실에 많은 시선이 김식인지 김밥인지에 호기심과 호감으로 모아졌다.
“쟤가 그 김식이구나. ”
분명 귀로 언어가 들어왔음에도 의미 없는 언어들 뿐이었다.
"소문대로 성깔 있게 생겼네."
어느 순간부터 지나치게 예민한 감각 때문인지 뒷자리의 속삭임이 한자 한자 정확히 들어왔다. 관심도 없는 이야기지만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모자 쓴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시력이 뚝 떨어지기라도 한 듯 사람들의 모습이 뭉게져 흐리게 보였다.
딱히 호기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지나치게 예민해진 감각에 따라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나 아까 봤어. 오토바이 타고 왔더라
오토바이란 단어가 내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뿌연 시야가 또렷해렸다.
처음 느낌은 까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맸다.
검은 니트 모자에 검은 점퍼 적당히 통 넓은 검은 바지에 검은 워커까지. 입구 쪽에 서 있는 남자는 단번에 눈에 띠였다. 요란한 소문의 주인공이 됨직한 어딘가 노련한 냄새가 언뜻 맡아지는 것 같았다. 이제 막 미성년을 벗어난 신입생과는 달리 어딘가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 보였다.
아는 누군가와 서서 대화하는 남자는 확실히 시선에 익숙해 보였다. 뒷자리 여자들 말고도 여기저기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한 번에 밀려왔다.
“원래 의대 간다지 않았나?”
“그렇게 시끄러웠으니 의대는 좀 무리였나?”
딴에는 속삭이는 듯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뒷자리 여자들의 말소리는 정확하게 전해졌다.
진실인지 가짜인지 모를 부풀어 오른 소문들이 내 귓가에서 웅성거렸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서 자리를 찾으려 고개를 돌리는 소문의 주인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현주 곁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가던 오토바이의 주인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본 건 찰라의 뒷 모습 뿐이었으니까.
남자에 대한 관심은 금세 사라졌다.
그냥 무의식적 반사 반응 같은 거였다.
뭔가 보고 있지만 보고 있지 않은 내 시선과 남자의 시선이 만났다.
왜 시선이 마주쳤는지 모르지만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남자의 입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빠르게 사라졌다. 얼핏 작게 웃기도 했다.
뭔가 미성년과 성년의 경계를 넘어 본 , 선을 넘어본 자의 여유만만함이 있는 듯한 느낌이 훅 하고 밀려왔다.
"야,야. 이쪽으로 와."
"어떡해? 들었나봐."
한껏 목소리를 낮춘 뒷자리 여학생들의 속삭이는 들었는지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기까지 했다.
"자리 없지?"
마치 당연히 빈자리 일거라는 확신이 어린 어투로 물었다. 그리곤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풀석 옆자리에 앉았다. 좁다란 계단 강의실의 의자에 남자의 몸이 꽉 끼는 듯 존재감이 훅하니 끼쳐왔다.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몸을 반대쪽으로 기울이며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어 앉았다.
“참, 아깐 쏘리. 네 여친이 그렇게 맥아리 없게 휘청거릴 줄 몰랐어. ”
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머릿속을 지배했던 어젯밤의 언어들이 단박에 밀려났다.
남자의 시선이 잠깐 붕대에 감긴 내 손에 닿았다 다시 내 눈으로 돌아왔다.
“뭐야? 그 여친이 그런 건 아니지?”
현주가 발견 못한 내 얼굴의 손톱 상처를 남자는 단번에 알아봤다.
“뭐, 둘이 괘나 알콩 거리던데….”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숨구멍이 막힌 것처럼 입이 반치는 뚝 떨어졌다.
“ 길 가운데로 사람이 많이 내려와 있어 피하다 보니…. ”
이해하지? 가 저절로 재생되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너네 나 알아?”
자연스럽고 당돌한 말투였다. 내 시선에 모자를 눌러쓴 남자의 뒤통수가 정확히 들어왔다.
“나 아.냐.고?”
이제까지 시시콜콜 이야기 하던 여자애들이 다소 긴장한 듯 얼어버렸다.
정말 저들끼리 재잘대던 소리들을 들었는지 한 음절씩 천천히 말했다.
“같은…ㅎ”
기어 들어가듯 한마디 하는 여자를 향해 매섭게 쳐다보았다.
“ 조용히 살자.”
남자는 몸을 돌리자마자 허리를 세우며 악수를 청하며 손까지 내밀었다.
"난 김 식."
나는 당당한 남자의 속도를 못 따라가 눈을 꿈뻑했다. 남자의 손을 어처구니없이 내려다보았다 .다시 시선을 들어 남자의 눈을 쳐다보았다.
입가는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은 남자.
그제야 무언가 번개처럼 머릿속을 내달았다.
나에게 하는 인사가 아니었다. 뒷자리에서 그들의 대화를 귀를 세워 듣고 있는 여자들에게 일부러 들려주기 위해 하는 노골적인 말이었다.
나는 남자를 향해 붕대를 감지 않은 왼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길게 펴서 녀석의 시선을 향해 당당히 날렸다.
“조까!”
“ 수줍어 하기는……."
마치 쿡하고 옆구리를 찌르는 듯 남자가 말을 걸었다.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하며 기막힌 듯 남자를 훑어보았다.
상대하고 싶지 않다고 노골적으로 드러냈건만 남자는 씩씩하게 웃기까지 한다.
뭐라, 대꾸할까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팽하니 돌려 외면했다.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세상 그 어떤 것과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입학식을 5일 앞 둔 봄의 길목에서 나는 뻔뻔하고 재수 없는 놈을 만났다.
◆◇◆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8일 만에 처음으로 학교에 나갔다. 언니를 배웅하느라 며칠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첫 수업도 그 외 모든 것을 놓쳐 버렸다.
현주가 염려하던 일이 내게 일어났다. 같은 과 동기의 얼굴을 모르겠다. 아니, 사실 나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다. 나와 관계 없는 사람들 얼굴은 언제나 뿌옇게 보였다. 현주는 나에게 차갑다고 했지만 타인들과 얽히는게 반갑지 않았다. 새삼 불편하지는 않을 거라 자신했다.
뒤 늦게 강의 시간표를 확인하고 겨우 수업을 들으러 갔다. 이미 아웃사이더라 점 찍어 놓고 신입생 환영회를 한다고 필참하라며 감시를 톡톡히 받았다.
학생회관을 빌려 신입생 환영회를 한다고 했다. 동기나 선배나 모르는 얼굴을 마찬가지. 지루하고 비루한 자리 틈바구니에 끼여 앉았다. 그냥 공짜라고 해서 배나 채울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어기적거리며 참석한 신입생 환영회는 어떻게든 신입생들에게 술을 마시게 하려는 뻔히 보이는 속셈을 가진 선배들과 어떻게든 노련하게 빠져나가면서도 인맥 좋은 새 학기를 시작하려는 신입생들 간의 꼬리 감추기 한판이었다.
그냥 나는 술을 마셨다.
내 앞에 놓인 술을 마셨다. 앞자리에 앉은 선배들이 몇 번씩 바뀌고 그때마다 손에 감긴 붕대에 대해 노골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을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저 적당히 술을 들이키며 적절히 분위기에 쓸려가 주었다.
어떤 교수님이 학점을 후하게 주는지, 어떤 교수님이 까다로운지에 대한 일장 연설이 끝난 후에는 잡다한 연애담으로 넘어갔고, 음담패설도 간간히 섞였다. 가끔씩 여자 동기들에게 좀 더 직접적인 관심과 희롱을 던지는 선배들도 있었지만 별로 관심 없었다. 내가 정확히 남자인지 여자인지 관심어린 시선도 관심 없었다.
시시하고, 지루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싶을 때가 되었을 때 일어섰다.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일어서는 순간 핑하고 머리가 돌았다. 빈속에 먹은 술 때문인지 손의 상처 때문에 먹은 약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화장실을 다녀오다 현관을 보니 조용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조금 휘청거리며 현관 쪽으로 발을 돌렸다.
후두둑, 후두둑
제법 경쾌한 박자감을 내며 비가 바닥에 부딪혔다. 비 냄새와 밤공기가 선뜻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비좁은 자리에서 느껴지던 체온과 소음이 가득했던 실내와 달리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입구에 서서 떨어지는 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둠과 가로등 불빛을 배경으로 땅바닥에 부딪혀 튕겨지는 빗방울이 꽤 재미있었다.
현관 처마 몇 걸음 떨어진 공중전화 박스 세 개가 나란히 서서 비를 맞고 있었다. 누군가 전화 하다 동전을 남기고 갔는지 50원 잔액이 깜빡깜빡 신호를 내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몸을 일으켜 공중전화 박스로 뛰었다. 잠깐 사이에 후두둑 팔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오늘은 늦는다고 전화해야지 하고 잠깐 생각했다. 그러다 전화 받을 사람이 이제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침에 제 손으로 배웅하고 돌아온 길이 아니던가?
“참…… 이젠 없지.”
허무하게 웃었다. 울지 않기로 했으니까.
전화박스에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가로등 불빛아래 쏟아지는 빗줄기가, 비 냄새가 좋았다.
이제는 늦은 귀가를 걱정해줄 사람도 없다. 저녁 메뉴를 함께 고심할 사람도, 휴일 스케줄을 의논할 사람도 이젠 없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전화기 박스 밖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쳐다보았다.
학생회관의 시끄러운 소음이 멀리서 들려오는 듯 아련하게 들려왔다.
찰칵.
혼자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작은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머리를 소리가 난 방향을 둘러보았다.
까만 어둠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남자, 눌러쓴 니트 비니모자. 라이터 불빛이 하얀 담배에 옮겨 붙는 과정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딱 경계선에 서 있다. 어둠과 불빛 사이의 경계. 비가 내리는 밖과 비를 맞지 않는 처마 그 사이의 딱 경계. 발간 담배를 물고 있는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어쩌면 나보다 먼저 와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알아채지 못할 만큼 남자는 어둠과 절묘하게 어울려 서있었다.
담배 연기가 남자의 입에서 후하고 밀려나왔다.
“뭐해?”
무게라곤 실리지 않은 산뜻하고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 구경.”
“비 구경?”
내가 하는 말이 이상한 듯 내 말을 고대로 따라했다. 공중전화박스 안에 쪼그려 앉은 내 꼴이 이상해 보였을지도.
“전화 할 데가 없어서.”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다시 하얀 담배 연기가 몽글몽글 퍼지는 모습이 아릿하게 눈 안에 들어왔다. 불빛 아래 담배를 빨아 당기는 입매가 너무나 맛나 보인다.
“너는?”
“그냥 생각 중.”
남자의 시선이 내 오른손에 감긴 하얀 붕대에 잠깐 머물렀다 다시 내 얼굴로 돌아왔다.
“나도 한대 줘.”
불쑥 충동적이 일었다.
“뭐?”
“그거, 담배. 나도 하나 줘.”
남자는 장승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내 말을 못 들은건지, 못들은 척 하는건지. 알 수 없는 시선이었다.
일어나기 귀찮은데….
쪼그려 앉았던 무릎에 힘을 주며 천천히 일어났다. 잠시 취기에 휘청거려 전화박스 벽을 잡았다. 속 시끄러울 땐 괜찮다는 언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다시 팔로 머리를 감싸고 냅다 현관 처마 아래로 뛰었다. 다시 후두둑 팔위로 비가 떨어졌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다시 남자의 시선이 다시 오른손 하얀 붕대와 내 얼굴을 오갔다. 그리고 느리게 담배 한가치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건네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남자 쪽으로 한발 다가섰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마주 선 남자는 키가 컸다.
나 보다 머리 하나 이상은 훌쩍 컸다.
뭐라 입을 열어 말을 하려는데 남자가 담배를 내밀었다. 담배 한 가치를 받았다. 잠깐 동안 남자의 체온이 닿은 것도 같았다.
낯 익은 듯 낯선 시선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담배를 손안에 들고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아 보았다. 하얗고 날씬한 그것을 입에 물자 박하 향이 나는 것도 같았다. 입에 물고 혀를 내밀어 보자 싸한 냄새가 밀려왔다.
“불!”
잠깐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라이터를 켜지 못할 손을 보여줬다. 친절히 라이터를 켜줄 것을 기대했다. 남자는 기 막힌 다는 듯 피식 웃더니 담배를 입에 문채 내게 급작스럽게 얼굴을 갖다 댔다. 나는 놀라 얼굴을 뒤로 물리려다 가까스로 버티고 섰다.
“불 달라며?”
노련하고 싶은데 잘 모르겠다.
서경언니는 라이터로 붙여줬는데?
“담배 끝을 대.”
남자의 발갛게 불이 붙은 담배 끝이 내가 문 담배 끝에 닿았다.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빨아. 당겨야 불이 붙지.”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담배를 힘껏 빨아 당겼다.
“쿨럭, 쿨럭.”
목안을 태울 듯 한 매운 내와 알싸한 니코틴 냄새가 사정없이 몸 안을 뒤흔들었다. 핑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난 주저앉아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역시 처음이네.”
남자가 내 손안에 들린 담배를 뺏어 남자가 불을 짓이겨 껐다.
쿨럭, 쿨럭.
마치 속을 뒤집을 듯한 네 기침소리에 남자는 혼잣말을 하더니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마치 서경언니처럼.
“겁도 없이 ….”
뭐라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연달아 목안을 간질이는 매운 내에 계속 기침만 토해냈다.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담배 맛은 독했다. 한참을 몸이 고꾸라질 듯 기침을 했다.
쿨럭, 쿨럭.
구토가 치밀 것 같은 어지럼증을 애써 이겼다.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아 가만히 숨을 길게 내쉬었다. 찔끔 흘렀던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나랑 잘래?"
나와 지나치게 가깝에 앉은 남자에게 불쑥 말했다. 마치 담배 한가치 달라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의외라는 듯 남자의 눈썹이 묘하게 꿈틀거렸다. 마치 내 마음의 경중을 가늠하는 듯……가만히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너 취했어?”
."싫어?"
봄비 아릿한 냄새가 담배 냄새와 어지럽게 뒹굴었다.
"싫으면 관둬."
"후회할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선문답처럼 두 사람의 말이 빠르게 오고갔다.
남자의 뒤로 크고 묵직한 어둠이 배경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내 속내를 읽겠다는 듯이 가만히 시선을 마주쳤다.
“남자랑은… 안 해 봤는데?”
진짜 곤란한 듯 한 표정이었다. 여전히 한손은 내 어깨에 대고 다른 한 손으로 진지하게 턱을 쓸었다.
“뭐래는 거야, 진짜. …조까.”
“저번부터 자꾸 까라는데, 뭐 까는 건 어렵지 않아. ”
충동적으로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쟈켓 안쪽 티셔츠 위, 내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내 몸에 여성이란 당당한 증거가 있는 곳에 댔다. 커다란 남자의 손과 겹쳐진 내 손 그 아래 뛰는 심장이 느껴지는 듯 했다.
“됐어?”
“잘…모르겠는데? ”
삐딱하게 고심하는 듯 한 표정에 욱하고 치밀어 올랐다.
“벗겨보면 알거 아냐?”
짹깍 짹깍.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 초침이 흐르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이 시간이 느리게 침묵으로 지나갔다.
“ 좋아. 리드는 내가 하게 해줘."
계산을 끝냈는지 한참 만에 노련한 바람둥이처럼 남자가 말했다.
"좋아."
나도 흔쾌히 말했다.
왼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고.
“깔끔하게 .”
담배 한가치를 얻을 때처럼 내 손은 어떤 무게도 의미도 없이 가볍게 남자를 향했다. 남자는 내 붕대에 감긴 손과 내민 왼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왼손을 내밀어 내 왼손을 잡았다.
“딴소리 하기 없기다.”
“절대로.”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협상은 간단히 끝났다. 마치 이 일의 무게 따윈 솜사탕보다도 가볍다는 듯이.
남자가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담배 불을 붙여줄 때처럼 얼굴이 가깝게 다가왔다. 불 붙일 담배가 없는데? 라고 생각한 순간 입술이 닿았다.
흡하고 숨을 멈췄다.
뜨겁고 습한 열기가 입안으로 밀려왔다. 쓴맛 같기도 하고 단맛 같기도 했다. 어찌할 줄 몰라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이것도 단지 협상의 일부일 뿐이었다. 악수처럼.
처음 맛본 키스는 봄비 같았다.
내 나이 용감한 스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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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랑쥐-
요즘은 혼전순결이 아니라 혼후 순결이라고 한다더군요
사실 저도 열녀문을 세울 정도로 혼후순결을 오래 지킨사람이라...
이 다음 장면이 심히 괴롭습니다. 쿨럭.... ;;;;;
푱이가
dupiyongstar@naver.com
모야 모야!!!
반백을 바라보는 나이에 설레게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