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낮은 주택가 골목사이로 불어온 찬바람에 하얗게 입김이 쏟아졌다.

타닥 타닥,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슬리퍼가 발바닥을 치며 소리를 냈다. 집 앞 골목에 잠깐 나온 듯 슬리퍼에 후드 점퍼만 걸쳐 입은 간단한 차림이었다.

 

새로 이사한 집에서 옥탑까지 골목을 따라 가는 중이었다.

지난번 살던 쪼개고 쪼개어 각박하고 치열에 가까웠던 집들과 달리 이곳은 안온하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골목이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모인 가족들이 따뜻한 밥상을 마주하고 즐거운 마무리를 나누는 저녁시간, 창문 밖으로 간간히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어지러운 생각으로 걸었다.

보통의 나는 망설이지 않는다. 틀린 결정이라도,

그런데 나는 아직 겨울이 남아있는 길바닥에 오래 서 있었다. 옥탑방이 보이는 건물 앞에서 나는 망설였다.

 

다시 차가운 바람이 정신 차리라는 듯 내 머리통을 세차게 때리고 지나갔다. 순간 어이없게도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이제 망설임도 배웠구나.

길바닥 한가운데에서 어처구니없게도 하얀 입김과 함께 바짝 마른 웃음을 쏟아냈다.

 

옥탑방이 있는 건물 주차장에 들어섰다. 고개를 들어 건물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지난 이년동안 매일 드나들던 집인데 낯선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혹시 김식이 집에 들어왔나 기척을 찾으려 꼼곰히 살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 한 구석에 서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지갑도 담배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하얗게 한숨과 함께 입김이 쏟아졌다.

 

계단을 향한 출입문을 가만히 노려보다 걸어온 방향으로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도로를 지나는 차 소음 사이로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라 걸음을 딱 멈추고 오토바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오토바이 소리와 섞여도 구별해 낼 수 있을 정도로 어느새 익숙한 스즈키 소리.

귀에 익은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오토바이 전조등이 환하게 나를 비추었다. 순간 눈이 부셔 손을 들어 급하게 시야를 막았다.

 

스즈키가 돌아왔다.

26개월의 군 생활을 끝낸 김식이 익숙한 태도로 오토바이를 타고 주차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김식이 지켜달라고 했던 집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이사를 나왔다.

 

부르르릉, 오토바이의 잔 소음 사이로 오토바이를 세우는 김식을 빤히 쳐다보았다. 헬멧을 벗은 김식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까슬하게 솟은 짧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날선 눈빛과 고집스럽고 단단한 턱과 입매가 드러났다. 지끈하고 작은 통증이 내 안 어디선가 튀어나왔다 사라졌다.

 

“왜 여기에 서 있어? ”

 

마치 안녕 하고 인사를 하듯 예사로운 어투로 물었다.

 

“아니면… 내려오는 길인가?”

 

능숙하게 오토바이 시동을 끈 김식이 긴 다리로 훌쩍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나는 어떤 대꾸도 없이 김식의 그런 모습을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이곳으로 걸어오는 동안 내내 생각했던 여러 가지 언어가 꽁꽁 얼어 버린 듯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밥은? 밥 먹었어?”

내 앞에 성큼 다가 선 김식이 그렇게 물었다.

이곳으로 걸어오는 내내 수 백가지 상황을 생각했지만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은 김식의 태도는 예상 문제 안에 없었다. 말년휴가 내내 뚱하게 화를 내던 그 모습은 지금은 어디에도 없다.

 

“대충.”

“올라가자.”

 

김식이 내 팔을 잡으려 손을 내밀었다. 나는 슬그머니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내민 팔을 비켜냈다. 아주 찰라의 순간 김식이 멈칫하더니 미간 사이가 뾰족해졌다.

나는 나를 살피는 김식의 시선을 피해 시선을 살짝 내렸다.

김식이 나를 앞서 먼저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쭐래쭐래 따라갔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숨소리만 울렸다.

지난 2년 3개월을 매일 다니던 계단을 김식 뒤를 따라 묵묵히 따라갔다. 어색한 숨소리만 공간에 울렸다

마지막 계단 앞에 새롭게 들어온 번호키를 김식이 꾹꾹 눌렀다. 내가 만든 비밀번호를 김식이 익숙하게 꾹꾹 눌렀다. 전자음이 울리더니 철컥하고 문이 열렸다.

나는 몰래 긴 숨을 내쉬었다.

 

짐을 옮긴지 고작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마치 처음 이 집에 들어온 냥 낯선 기분으로 섰다.

 

집 안에 들어섰는데 갑자기 한기가 들었다. 바깥보다 따뜻한 곳에 들어왔는데도 갑자기 느껴진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근데, 너 그러고 왔어?”

 

가방을 내려놓던 김식이 어느새 몸을 떠는 나를 보더니 짧은 순간 시선이 슬리퍼를 벗고 선 얇은 양말만 신은 내 발까지 내려갔다.

 

“별로 멀지 않아서.”

 

내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있다.

 

“졸업식장에 잡으러 갈까 했더니.”

 

작은 말이었다. 마치 혼잣말처럼 픽 거리며 김식이 한 말이 천둥처럼 내 귓가에 울렸다.

 

“뭐?”

“야반도주 한 것처럼 짐 다 챙겨서 튀었잖아. ”

 

김식이 깔끔해진 방 안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보답을 하려 했지.”

 

그리곤 삐뚜름한 눈매로 김식이 내게 물었다.

 

“다 챙겨 간 거 아니야.”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또다시 피식 거리는 김식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니 여친이 준 그림 챙겨 갔으면 다 챙긴거지. 이사 들어오는 날에도 품에 안고 왔잖아. 너의 영역 표시 같은 건가? ”

 

어정쩡히 서 있는 내 앞에 김식이 다가와 섰다.

 

“입술이 아주 새파랗네.”

 

김식이 엄지손가락을 내 입술에 댔다. 나는 고작 아주 살짝 움찔하게 머리를 뒤로 빼려했다. 멈칫한 김식이 다시 찌푸리더니 기어이 내 입술을 만졌다. 따뜻한 온기가 입술에 잠깐 닿았다.

 

아주 잠깐 동안 김식의 호흡이 내 얼굴위로 쏟아졌다.

 

“너 차가워.”

 

입술에서 손을 뗀 김식이 커다란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지난번에도 감기 걸려 골골 거리더니.”

 

쯧 하며 혀를 차더니 잡고 있던 내 뺨을 꾸욱 눌렀다. 입술이 부리처럼 삐죽이 튀어나왔다.

 

“하여간 정신머리가 없지. 앉아있어. 따뜻한 거 가지고 올게.”

 

김식은 다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두고 간 요란한 무늬의 밍크 담요를 꺼내와 내 어깨위로 둘러주었다. 마치 그 날 같았다. 내 정신이 나가 버린 그 날.

 

[누가 보면 아주 임신한 마누라 수발드는 줄 알겠다.]

 

서경후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너랑 더 가고 싶은데… 이제 집 안에 둔 콘돔도 버리고 말야.]

 

그리고 김식이 했던 말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몸 깁숙한 곳에서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화르륵 올랐다.

 

몸을 한껏 웅크리고 앉아 담요를 두르고 소파에 앉았다. 털썩 고개를 쇼파 등받이로 기대였다. 노란 전등이 눈을 찌르듯 들어와 잠깐 눈을 감았다. 다시 몰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주방 쪽에서 김식이 움직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주전자 내려놓는 소리, 스푼 부딪히는 소리. 일상적인 소리인데도 나는 바짝 긴장하고 들었다.

 

내게 다가오는 김식의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성큼성큼 다가와 내 옆에 앉을 때까지도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덥석 손이 다가와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아니…나는 열이 나.

김식의 손이 닿았던 이마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감은 눈 위로 나를 내려다보는 김식의 시선이 간지럽게 느껴졌다.

 

“너 때문에 머리가 아파.”

 

한숨처럼 내가 말했다.

 

“누가 할 소리.”

 

발끈하며 김식이 말했다.

 

“내 머리가 더 아파.”

 

고개를 들어 김식을 노려보았다. 한손엔 김이 오르는 잔을 든 김식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입을 한 치 떨어뜨리고 나를 보고 있었다.

“기껏 제대하고 왔는데… 너는 없지. 진짜로 짐 싹 빼고 튈 줄은 몰랐지. 맨날 튈 궁리나 하고 말이야. 처음부터 이름도 안 알려주고 나만 이용해먹고 튀었잖아.”

화살을 날리듯 김식이 조목조목 말했다.

 

“ 아주 튀는 게 습관이지.”

“다 뺀 거 아니라고. 담요도 여기 두고 갔잖아.”

“이깟 담요가 뭐라고. 불량품이라고 싸게 사온 주제에. ”

 

김식이 뽀로통하게 말했다.

아, 얘는 진짜!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화가 0.1초 내에 머리 꼭대기까지 올랐다.

 

“아니라고. 잠옷이랑 칫솔이랑 필요한건 다 빼놨다고.”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눈을 노려보았다. 김식도 나를 보고 있었다.

 

“진짜?”

 

순간 눈을 예쁘게 접으며 김식이 웃었다.

 

“넌?…하아.”

 

말문이 막혀 이번엔 내가 입을 한 치나 떨어뜨렸다. 따뜻한 잔을 김식이 건네주었다.

 

“마셔.”

김식이 건네준 잔을 받았다. 내가 한 모금 마실 때까지 김식이 나를 재촉했다. 예쁘게 접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뜨겁고 달달한 차를 한 모금 또 한 모금 마셨다. 바짝 날이 섰던 신경이 조금은 무뎌지는 것 같았다.

 

“지난번에 이사 한다고 말했잖아. 졸업식 때 엄마가 오고 싶대. 제대로 된 졸업식은 내가 처음이라 나 사는 곳도 볼 겸 꼭 오고 싶으시대. 그동안 한 번도 못 오셨다고.”

 

나는 변명하듯 김식에게 말했다.

 

“여기로 올순 없잖아.”

 

김식은 가만히 내 말을 들었다.

 

“그리고….”

 

잠깐 숨을 골랐다. 내가 꼭 하려고 했던 말이 목 끝에 걸렸다. 커다란 덩어리처럼 목 안을 꽉 채웠다.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꾹꾹 눌러놓았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말을 꺼냈다.

 


 

“나… 아버지에게 간 적 있어.”

 

한숨과 함께 말을 쏟아냈다.

김식의 시선이 내 눈에 닿았다. 음? 하고 묻는 거 같았다.

지난번 싸운 이후로 나는 내가 해야 할 말을 내내 골랐다. 이것은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고 김식도 그것을 알아챘다.

 

“가을부터 동네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 처음엔 우리가 지나가면 조심하는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대놓고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사람들이 생겼어. 아버지가 아파트로 이사 간 걸 아냐고. 새로 생긴 곳이고 꽤 좋은 곳이라고도 하고. ”

 

언니들에게도 현주에게도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말이었다. 내 심장에 박아 놓은 가장 큰 가시를 처음으로 꺼냈다.

 

“엄마는 아버지 가게가 많이 바쁘다고만 했어. 집에도 못 올 만큼. 가게에 가면 안된다고도 했고. 사람들이 나만 보면 혀를 차더라고. 꼬맹이가 못 알아들을 거라 생각한 건지 수군대는 걸 멈추지 않아서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수 있었어. ”

 

김식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 할 수 없어 시선을 비끼고는 내 손에 잡고 있는 잔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아버지를 제일 닮았대. 동네 사람들이 가끔씩 아들로 보고 닮았다고 하면 아버지가 아주 기분 좋게 웃었어. ”

 

자꾸 입이 말라왔다. 그러나 잔을 들어 마시지는 않았다. 나는 무사히 내가 해야 할 말을 끝내고 싶었다.

 

“아파트가 보이는 방향으로 걸어가면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어. 그래서 그쪽 방향으로 걸었어. 내가 아파트로 찾아가면 아버지는 분명 좋아할거라 생각했어. ”

 

나는 그날의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겨울이 끝나고 봄 햇살이 길어지던 날에 타박타박 걸었다. 할머니도 자주 다니러 다니던 그 길을 나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햇살의 나른함도, 찬 기운을 품고 있던 바람도 기억한다.

 

“내가 그 집을 찾아가면 기특하다고 보고 싶었다고 해 줄줄 알았지.”

 

어떤 눈으로 나를 보고 있을까?

무서워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방향은 맞는데… 아무리 걸어도 아파트가 나오지 않더라구. 많이 멀지 않다고 했는데, 몇 시간은 걸은 것 같았는데 … 다리도 점점 아파오고 날은 쌀쌀해지고. 해가 지고 있는데도 나는 계속 길 위에 있었어. ”

 

다시 가만히 숨을 골랐다.

 

“지나가는 아줌마를 붙잡았어. 길을 잃은 것 같다고. 전화 좀 걸어달라고.… 아버지 가게 전화번호를 말했어. 그러면 아버지가 데리러 올 거라고 생각했어. 그 아줌마네 집에서 내준 물 한잔을 마시고 기다렸어.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신이 났던 것도 같아.”

 

그때의 그 집 마당이 또렷이 생각났다.

“기다리다가 잠깐 졸았어. 남의 집 마루에서.”

 

느리게, 느리게 전하는 내 오랜 가시를 김식은 가만히 들었다.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어떤 덩어리를 내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잠깐 잠에서 깼는데 엄마가 왔어. 노란 불이 환한 그 집 마당에서 나를 등에 업고 엄마가 아줌마에게 인사를 했어. 고맙다고.… . 나는 엄마에게 아빠는? 하고 물었어.”

 

나의 비열했던 시간에 대한 고백이 또다시 목을 꽉 채웠다.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많이 바쁘시대. 라고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갈라져있었어. 깜깜한 밤에 엄마가 나를 업고 걸었어. ”

 

나름 각오를 했다. 오래 묵혔던 이 지점을 얘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각오를 했다.

 

“엄마가 몰래 울었어. 나를 등에 업고 가는 길에서 내가 깰까봐 몰래 울었어. ”

 

그런데도 가슴이 뻐근했고 울컥울컥 뜨거운 덩어리가 밀고 올라오다 어느 한 곳에엉켜 체한 듯 했다.

 

“사실은 나…아버지를 데리러 간 게 아니야. ”

 

다시 긴 숨을 내쉬었다. 나는 말해야한다.

 

“아버지와 미스김 언니가 같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걸 알고 있었어. 미스김 언니도 나를 좋아했어. 그래서 언니도 내가 찾아가면 좋아 할 줄 알았어. 예쁜 미스김 언니랑 아버지랑 새 집에서 나도 같이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나는… 나랑은… 같이 살자고 할 줄 알았어.”

 

다시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다시 꾸욱하고 덩어리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내리눌렀다.

 

”…나는… 같이 살려고 간 거였어.“

 

폭탄처럼 내 추악한 가시를 털어놓았다.

오래 달리기를 한 것처럼 숨이 찼다.

 

“그때 알았어. 아버지는 내가 필요 없다는 걸.”

 

내가 얼마나 나쁜 년이었는지, 그날 나는 엄마를 버리고 아버지에게 갔었다고 겨우겨우 말했다.

 

나를 어떤 눈으로 김식은 보고 있을까?

불쌍하다고 생각할까?

나의 영악함을 경멸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잡고 있던 컵을 억세게 잡았다.

 

“나는 아버지한테 못가. 아니… 안가. 나한텐 그날, 그 집 마당이…거기가 끝이야. ”

 

커다란 손이 뻗어와 억세게 컵을 잡아 핏기가 가신 내 손아귀 안에서 컵을 빼내어갔다. 그리고 나를 가만히 껴안았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네. ”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김식이 말했다.

 

“뭣대로 가야한다고 말해서 미안해. 다신 가라고 안할게. 그날 거리에서 너가 깨질 것 같았단 말이야. ”

 

토닥토닥 아주 따스하게 커다란 손으로 내 등을 두드렸다.

 

“…꼬맹이가 아주 무서웠겠네.”

 

그러나 나는 마지막 말은 하지 못했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 갇혀 미처 나오지 못한 언어처럼 내 안 깊숙한 곳에 숨겨둔 마지막 말을 꺼내지 못했다.

- 나를 용서할 수 없어. 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싫어. 엄마도 버린 나쁜 년은 벌 받아야 하니까.- 그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하도 비장한 표정으로 있길래 좀 쫄렸는데…”

“내가? 비장하다고? 아니 너가 쫄려?”

“그만하자고 할까봐 엄청 쫄았지. 나름 눈치 엄청 보고 있다고.”

 

고개를 들어 김식을 바라보았다. 내 얼굴을 마주 본 김식이 흐리게 웃었다.

 

“아까 팔 잡을 때도 물러서고 또 선 그었잖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건…미안해.”

내 말에 김식이 바짝 다가와 내 입술에 도장을 찍듯 입술을 꾸욱 대었다 뗐다.

몸 안에 팽팽하게 당겼던 긴장감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줄어들었다.

 

“근데 넌 왜 나 때문에 머리가 아파?”

 

장난스러운 말투로 김식이 물었다. 내 허벅지 위로 다리를 올려 놓고 꾸욱 내리 눌렀다. 익숙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너랑 있으면 자꾸 이상해져. 여태 잘만 살아왔는데 … 초조하기도 하고, 망설이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고. 오늘도 봐. 안하던 말도 다 하게 되고.”

 

참고 있던 숨을 터뜨리는 것처럼 우다다다 쏟아냈다.

어지러운 경험, 어지러운 생각, 회오리처럼 내내 나를 불편하게 하던 감정이 쏟아졌다.

 

“진짜… 기분 나빠.”

뽀로통해져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바로 곁에서 쿡쿡 웃는 김식의 웃음소리가 뺨을 간질렀다.

 

“인경아, 조인경.”

 

김식이 다정하게 나를 불렀다.

 

“인경. 나 좀 봐봐. ”

 

고개를 돌려 김식을 바라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김식의 눈동자 안에 따뜻함이 일렁거렸다.

 

“내가 좋아?”

 

아주 달달하게 김식이 물었다.

 

“아니.”

 

나는 거만하게 대꾸했다.

“거짓말.”

 

김식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확신하는 당당한 저 웃는 얼굴이 얄미워졌다.

 

“넌 좀… 우쭐거리게 해.”

 

나는 툭 하니 말을 했다. 꼿꼿하게 앞만 바라보는 내 앞으로 김식이 얼굴을 가가이 댔다.

 

“우쭐?”

“그때 축제 때 우동에 어묵 한 개 더 넣어줬을 때 그랬고, 밤에 제일 이쁜 사람한테 뽀뽀하라고 했을 때 나에게 왔을 때 좀 우쭐했어.”

 

아,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손가락 끝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또? 또 있어?”

“니가 춘천 집에 황금보자기 들고 왔을 때도 우쭐했지.”

“또?”

“스즈키 뒤에 나만 태운다고 할 때도 쫌 좋았어.”

 

내가 미쳤나보다. 이런 말까지 다 하고.

 

“가끔씩 진짜 여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손끝부터 열이 올랐다. 이건 마치… 고백같잖아.

 

“나도 많이 노력하고 있다고.”

 

큭큭큭 웃던 김식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보드랍고 말캉하고 따뜻한 입술이 내 입술을 열고 입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오랫동안 단단하게 겹쳐있고 굳어있던 빗장하나가 살그머니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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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늦었습니다.

4월 한달만 생각 정리겸 쉬려고 했는데

쉬는것도 관성이 붙어 점점 더 길어졌네요.


요 뒤에 나름 야한 19 장면이 있는데 이건 저만 볼께요.

게시판 접근이 회원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열려있어

저만 봅니다.



푱이가



dupiyongsta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