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D-9 일
공식적으로 이사를 하고 난 첫날을 보냈다.
이 집에서 겨울은 처음이었다. 밤을 지낸 방의 공기가 따뜻했다. 이전 집에선 벽을 통해 숭숭 들어오는 외풍 때문에 겨울 초입부터 두꺼운 이불로 감싸야 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집 안에는 나 혼자 있었다. 통창을 통해 환한 빛이 밀려들어온 방에서 나른한 기지개를 켰다. 이사 첫날에 첫날밤 치르듯 거하게 시달렸다. 억센 뼈마디와 부딪힌 곳곳에서 둔중한 통증이 밀려왔다. 시간을 확인하니 제법 게으른 늦잠을 잔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내 마음이 편한 가 보다.
D-8 일
또 김식은 이미 나가고 없는 아침이었다.
무엇 때문에 바쁜지 하루 종일 얼굴 볼 새가 없다. 그동안 체력을 지나치게 혹사한 탓인지 나는 한낮에 소파 앞에 앉아 약 먹은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냉장고에는 먹을 것이 풍부했고 나는 노약자처럼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D-7일
도대체 낮 시간 동안 무얼 하느라 바쁜지 물어보려했다.
해가 진 뒤 먼지투성이로 집에 들어온 김식은 샤워를 하더니 내 저녁을 차려주고는 다시 나가버렸다.
D-6일
보통의 나는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했다. 오늘 하루를 살아냈다는 외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자꾸 시계를 보고 있다. 느리게 가는 시간이, 아니 빠르게 사라지는 하루에 자꾸 짜증이 났다.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김식은 내가 눈 뜬 시간엔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내가 시간에 쫓기듯 살았을 때 툴툴거리더니 정작 내 시간이 많아지자 김식의 꼴을 볼 수가 없다.
한가한 하루가 이렇게 긴 줄 몰랐다. 지루한 시간을 견디려 손에 잡히는 책을 읽다가 졸다가 혼자 맥주를 마셨다.
D-5일, 4일
이사 올 때 가져온 내 이불을 통창 앞에 깔고 거기에 누웠다.
며칠이나 나를 팽개쳐 둔 김식에 대한 항의이기도 했다. 기껏 열흘을 당겨 이사 들어왔는데 좀 더 버틸걸 하고 후회를 했다.
새벽까지 기다리다 겨우 잠들었다.
밤늦은 시간에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김식이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나를 바짝 끌어안았다.
잠기운을 떨치고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 눈을 뜨려했다.
“그냥 자.”
김식이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마치 아기를 재우는 엄마의 손처럼 커다란 손으로 느린 리듬으로 나를 토닥거렸다. 그 리듬이 좋아 나도 모르게 또 잠들어 버렸다.
D-3
“그냥 춘천이나 확 가버릴까보다. ”
눈을 떴을 때 나를 압박하던 무거운 체중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도 또 김식은 이른 시간부터 사라져버렸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열흘은 채워 주는 거 아니었어?”
누운 채로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깔아놓은 이불 옆 소파에 김식이 나른하게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는 며칠 전부터 내가 붙잡고 보던 책을 들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하도 바쁜 척 해서 말이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삐졌어?”
“내가 왜?”
“너 머리 뻗쳤어.“
김식이 손을 뻗어 내 머리를 꾹꾹 누르며 쿡쿡 웃었다.
“볼 때마다 자고 있더만.”
“눈 뜰 때 마다 나가고 없더만.”
“악덕주인이 놔줘야 말이지. 아주 끝까지 탈탈 부려먹더라고. 인사할 사람들도 많고. 이제 거의 다 했어.”
김식이 실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도 알바 하러 가야한다며 말했던 그 주인인가?
“이사하라고 그렇게 조르더니 날 집지키는 강아지로 쓰려고 부른 거지?”
베개를 잡아 김식에게 던졌다.
김식이 가볍게 베개를 잡아채고는 옆에 차분히 내려놓았다. 베개를 던지느라 올라간 소매 자락 위로 은색 팔찌가 딸랑거렸다.
“삐진 거 맞네.”
“이거 뭐야?”
축제 때 서경후 덕분에 얻어 찼던 팔찌 모양과 비슷한 별과 반달이 딸랑거리고 있었다.
“족쇄.”
햇살아래 팔을 들어 별과 달을 딸랑거려보았다. 축제 때 받았던 가죽 끈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은색 체인이 튼튼하게 이어져 있었다.
“예쁘네.”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내 말에 김식이 흡족한 듯 웃었다.
“이따 저녁에 그 놈들 만날 거야.”
지난번에 만나고 싶다는 내말에 대답을 이제야 했다.
팔찌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새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김식 몰래 웃었다.
늦은 시간에 도착한 가게는 [황소갈매기살] 이란 가게였다. 가게에 들어서자 이미 한 장우가 한쪽으로 자리를 봐놓고 있었다. 한 장우도 이런 알바가 익숙한 듯 몸놀림이 능숙했다.
“쟤는 한 장우. 많이 봤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으로 인사를 해왔다. 학교 안에서 김식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은 한 장우였다.
“식이 왔어?”
“어서 와.”
가게 주인의 인사에 주방 안쪽에서 불쑥 얼굴이 튀어나오더니 김식을 향해 친근한 인사가 전해져왔다.
지하철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먹자골목거리는 내가 올 일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나는 주로 시장 쪽 길을 좋아했다. 그런데 김식과 함께 이 골목으로 들어서자 뭔가 이상했다.
추운 날씨에도 가게 주인이 문을 열고 김식을 향해 선뜻 아는 체를 해왔다. 앞치마를 두르고 바쁘게 걷던 사람도 길을 멈추고 김식에게 인사를 했다. 마치 이 골목에서 나고 자란 사람처럼 사람들과 친숙했다. 어떤 사람은 오늘은 어느 가게로 가냐고 물었고 어떤 사람은 오늘도 그 예쁜 학생이 오냐고도 물었다.
그들의 인사는 호의적이었고 친밀했다.
김식은 외투를 내 옆자리에 벗어놓자마자 능숙하게 가게에서 당장 필요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손님이 나가버린 테이블을 치우고 내가 앉은 자리엔 빨갛게 불이 붙은 숯불을 내왔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이 가게에서 일한 듯 머뭇거림이 없었다.
“애들 오면 제대로 못 먹으니 먼저 먹어.”
집게를 잡고 능숙하게 불판 위에 고기를 올리며 김식이 말했다.
달아오른 불판에 올린 고기를 적당히 뒤적거리다 익은 고기를 내 앞 접시에 올려주었다.
“이거 먹고 날아가면 안 된다. ”
“이게 갈매기살이야?”
김식의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듣고 앞 접시에 올려준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었다. 쫀득한 식감이 재밌는 맛이 났다. 김식은 오물오물 맛을 보는 나를 마치 엄마처럼 쳐다보았다.
“너 왜 알바생처럼 굴어?”
살짝 엉덩이를 들어 김식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전에 알바 했던 집이야. 그리고 걸신들린 그놈들 처먹는 거 대려면 이래야 빨라. 이따 저기 손님들 가고 나면 아예 가게 문 닫고 먹을 거야.”
입안에 고소한 고기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만족하게 고기를 먹는 모습을 확인한 김식이 다시 또 고기를 내 접시로 올려놓았다.
한 장우가 시원한 소주 병 여러 개를 들고 테이블위에 내려놓았다.
“맥주 필요해?”
“아니.”
가게 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뽀송한 털이 달린 가죽점퍼를 입은 서경후가 들어왔다. 웨이브를 넣은 까만 머리칼에 헤어밴드까지 한 독특한 모습이었다. 추운 날씨를 온 몸으로 가지고 들어온 서경후는 오늘도 차갑게 예뻤다. 가게 안에 앉은 손님들이 모든 시선이 서경후에게 몰렸다.
“으으 추워.”
강아지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키가 큰 김식을 먼저 찾아내고 한껏 반가운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표정이 싸늘하게 변해버렸다.
“너, 너가 왜 여기 있어?”
나를 쳐다보는 눈빛 속에 거부감이 들어있다.
“너는 여기 왜 왔는데?”
“밥 먹으러 왔지.“
“나도.”
뭔가 억울한 표정을 하더니 빠르게 김식의 눈치를 살피고는 내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쟤가 서경후. 이미 알고 있지?”
“어, 빈털터리로 다니는 애.”
내 말에 김식은 쿡쿡 거리며 웃었다.
“오늘은 지갑 가져 왔거든. ”
툴툴거리며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앞접시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김식에게 내밀었다.
“우리끼리만 보는 거 아니었어? 여태 뭐 하느라 이제 부른 거야? 이제 3일도 남지 않았구만. ”
김식이 내 앞 접시에 또다시 익은 고기를 내려주었다.
“나, 나는? ”
“니가 알아서 쳐 먹어.”
마지막 고기를 내 앞 접시로 다 올려놓은 김식이 새로운 고기를 듬뿍 올려놓고 새롭게 굽기 시작했다.
“야, 넌 여자라며 왜 그렇게 생겼어?”
“넌 남잔데 왜 그렇게 생겼는데?”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서경후가 예민하게 물었다.
“근데 진짜 여자 맞아?”
“넌 진짜 남자 맞고?”
“아씨.”
“그럼 같이 까 보던가. 제대로 달려는 있고?”
슬쩍 허리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올리니 서경후의 뺨이 빨개졌다.
“아씨. 생긴 거 갖고 놀리면 반칙이지.”
“너가 먼저 시작했거든.”
김식이 앞에 앉은 서경후 뒤통수를 때렸다.
“너 쟤한테 안 된다고 했지? 얼른 쳐 먹기나 해.”
“나한테만 그래.”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리는 서경후가 웃겼다. 김식이 새롭게 구워진 고기를 서경후 앞에도 내려놔주었다. 그게 좋은지 서경후가 빠르게 젓가락질 하며 고기를 입에 넣고는 과장되게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소주병을 잡아 두 껑을 열었다. 작은 잔에 술을 따라 서경후 앞에 밀어주었다. 그리고 내 잔에도 술을 따랐다. 김식이 그런 나를 쳐다보았다.
한 장우가 뜨거운 된장찌개를 가져와 테이블에 놓고 내 옆쪽 자리에 앉았다. 커다란 뚝배기 안에 커다란 고추가 통째로 들어있는 된장찌개가 먹음직스러웠다.
나는 또 술잔에 소주를 따라 한 장우 앞에 슬쩍 밀어주었다. 한 장우가 나와 눈을 잠깐 맞췄다. 눈빛으로 고마워 하는 것 같았다.
가게 안에 올백 머리를 한 살벌하게 잘 생긴 남자가 들어왔다. 서경후가 여리여리한 아름다움이라면 주기도는 베일 것 같은 잘생김이었다. 한 장우가 도덕적이고 바른생활사나이처럼 보인다면 주기도는 야비한 짓도 서슴지 않을 만큼 잔인한 잘생김이었다.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넣은 채 걷는 주기도의 날카로운 눈빛과 시선이 마주쳤다.
“너 이제 주기도한테 죽었어. 쟤 법대 다녀.”
서경후가 빠르고 낮은 목소리로 김식의 눈치를 보며 내게 말했다. 주기도가 테이블에 가까이 오는 동안 내 시선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눈을 피하면 안 될 것 같아 나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쟨 왜 데려왔어?”
서경후와 똑같은 말을 하며 주기도가 말했다.
“내 맘이지.”
불판을 갈며 김식이 먼저 대답했다.
이제 올 사람이 없다 싶었는데 요란스레 가게 문이 열렸다. 초록색 앞치마를 한 아줌마가 큰 냄비를 갖게 숨차게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식이학생 오늘은 여기서 먹는다면서?”
집게를 내려놓고 김식이 방금 들어선 사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며 꾸벅 인사를 했다.
“군대간담서? 여기 닭볶음탕 해왔으니 이것도 먹어.”
커다란 냄비를 김식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다정한 이모처럼 안타까운 표정을 하던 아줌마는 앞치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김식의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아쉬운 듯 망설이더니 덥썩 김식이 손을 붙잡았다.
“오늘은 학생이 하나 더 늘었네. 식이학생은 어데서 저런 이쁜 애들만 데려오는지…저 짝 이쁜 학생도 같이 가남?”
“잰 면제 받았어요.”
“조롷게 예뻐서 어떻게 군대를 가나 했더니 잘됐네. 잘됐어.”
그렇게 우리 테이블에는 서경후와 한 장우가 흡입하듯 먹는 갈매기살 외에 커다란 냄비에 담긴 빨간 닭볶음탕이 하나 더 늘어났다.
그 뒤로 계속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손님이 모두 나간 가게 안에 앞치마를 맨 사람들이 하나 둘씩 쟁반에 음식을 받쳐들고 찾아왔다. 양념 꼬막무침이 한 접시 크게 오기도 했고, 뜨끈한 파전이 오기도 했다. 뜨거운 잔치국수도 오기도 했다. 음식을 가져온 사람들은 김식을 찾았고 봉투를 넣어주기도 하고 손을 쓰다듬기도 했다.
그 사람들은 김식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김식과 먹자골목 안에서의 김식은 다른 사람 같았다.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김식.
테이블 위에 음식이 넘치게 올라왔다.
“너 진짜 식이랑 사겨? 저 놈이 지 꺼를 쉽게 내놓을 놈이 아닌데.”
김식이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자리를 빈 사이 닭다리를 야무지게 뜯어먹은 주기도가 더 빨개진 입술로 내게 물었다.
“아니.”
주기도나 한 장우나 서경후는 김식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아마도 지난 시간 속에 김식의 모습을 많이 보아온 것 같았다.
“아니지? 사귀는 건 진짜 아니지? 내 그럴 줄 알았어. ”
파전을 뜯어먹고 입술에 기름을 묻힌 서경후가 대뜸 말을 끼어들었다. 개운한 표정으로 새 소주병의 두껑을 땄다.
“한잔 받어.”
서경후가 옆에서 설레발을 하는 사이 주기도와 나는 팽팽한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냉정한 눈빛 따위야 얼마든지 ….
“나랑 군대 같이 가는 거 알아?”
“나랑 침대를 같이 쓰는 거 알아?”
내 말 한마디에 살얼음 같은 긴장이 내려앉았다. 술을 따르던 서경후가 작은 잔에 소주가 넘치도록 따랐다. 턱을 뚝 떨어뜨린 채 정신을 빼놓은 서경후에게서 소주병을 빼앗았다.
“사귀는 거 아니라며?”
“너는 사귀는 사람하고만 자? ”
내 잔에 소주를 따랐다. 꼴꼴 소리를 내며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야, 야… 너어.”
서경후가 보기와는 다르게 순진하게 빨개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별거 아니네.”
차갑게 말을 쏟아내고는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김식의 짐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나 조금 잘 보이고 싶었나보다. 그런데 망해버렸다. 헛웃음이 났다.
“야, 식이는 어떻게 만났어?”
“학연으로.”
“씨바.. 니네 학교 학생이 몇 명인데? 그런 걸로 어떻게 만나?”
옆자리에 앉은 한 장우도 내심 궁금한 눈치였다.
빨개진 서경후는 대놓고 나를 보았고, 주기도는 날카롭게 나를 살폈다.
“그럼…흡연. 담배를 하나 달라고 했어. 불도. ”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날의 기억이 툭하고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씨발…악연이네.”
“인연이겠지.”
내 말에 한 장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주기도 이제 고만 갈궈. 우리 과 교수가 식이가 과 바꿨다고 얼마나 갈구는 줄 알아? 식이한테 걷어차이기 전에 그만 해.”
한 장우가 내게 술을 따라주었다. 입꼬리가 아직도 올라가 있어 나도 흔쾌히 내미는 그 술을 받았다.
“그럼 쟤 때문에 식이가 의대 안 갔다는 거야?”
서경후가 한 장우를 보며 묻자 한 장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응해주었다.
김식이 자리로 돌아왔다. 내 옆자리에 앉은 김식은 내 의자 뒤로 자연스럽게 팔을 걸쳐놓았다. 앞자리에서 볼 때 마치 내 어깨에 손을 걸친 것처럼 보였다. 마치 내꺼라고 영역을 표시하는 듯 한 모습이었다.
서경후는 다시 턱을 떨어뜨렸고 주기도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 장우는 나를 사이에 두고 김식과 소주잔을 건배했다.
12월의 밤이 깊어졌다.
나는 김식 쪽으로 몸을 기울려 작은 소리로 물었다.
“쟤네 둘은 서로 싫어하는 거 같은데?”
앞에 앉은 서경후와 주기도를 쳐다보았다. 내 의도를 눈치 챈 김식이 내 귓가에 입을 대고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동족혐오 같은 거야.”
푸훗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보는 주기도의 찌푸린 눈살도 새침하게 삐치는 서경후의 입매도 즐겼다. 김식이 기꺼이 짐이라고 말한 사람들을 만나 무사히 잘 다녀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대신 나는 가끔씩 김식과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며 시비를 걸었다.
그날의 나는 그들에게 아주 유치했다.
D-2
“우와…이 집에선 달도 보여.”
통창 앞에 깔아놓은 이불위에서 허우적 거리며 소리쳤다. 팔찌가 있는 손을 번쩍 들어 달을 향해 손을 흔들다 키드득 웃었다.
“먼저 집에선 해도 안 보였는데, 달이 보여. 너 알았어? 집에서 달이 보여.”
주기도가 집에서 가져왔다는 위스키 병을 꺼냈다. 테이블위에 빼곡이 쌓인 소주병 사이로 갈색 위스키가 보태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정신줄은 괜찮았다.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뜨문뜨문 끊어져 있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서경후와 주기도가 테이블에 길게 엎드려 잠들어 있었고 김식과 한 장우가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다시 기억이 돌아왔을 땐 김식의 등에 업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현관 앞에서 김식의 등에서 내려섰다. 방안에서 걷는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한쪽으로 쏠리며 걸었다. 그 꼴이 우스워 웃었다. 겨우 통창 앞까지 와 엄마의 이불을 휘청거리며 바닥에 깔았다.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달이 보여.”
까르르르 또 나는 웃었다. 웃기지도 않은데 그냥 웃었다.
“식아.”
주방 앞에서 물을 따르고 섰던 김식이 나를 요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걔들이 너를 그렇게 부르더라. 식아.”
까르르르 나는 또 웃었다. 자꾸 웃음이 났다. 내 팔목에서 딸랑이는 별과 반달도 허공에서 흔들며 또 웃었다. 김식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 상체를 일으켰다. 내 몸속에 피보다 알콜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움직일 때마다 술이 출렁이는 거 같았다.
“사람들이 군대간다고 막 봉투를 줘. 너 되게 착했나봐. 첨 봤어. 다들 이모처럼 너를 대하더라. 나중에 너 결혼하면 축의금 엄청나겠다.”
나는 또 웃었다.
물 잔을 들고 김식이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자꾸만 키득거리는 나와 달리 김식의 표정은 어딘가 조금 딱딱했다.
“완전 주정뱅이네. 물 마셔.”
나를 부축하며 물 잔을 입가에 대주었다. 시원한 물이 입가에 찰랑였다. 살짝 한모금만 마셨다. 더 마셨다간 몸 속에서 출렁이는 파도가 생길 것 같았다.
“너 그때 말이야. 처음에…”
내가 밀어낸 물 잔을 든 김식이 테이블 위에 잔을 올리려 몇 걸음 옮겼다.
“ 내가 자자고 했을 때….”
테이블 앞에 물 잔을 올려놓은 김식을 향해 나도 무릎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김식의 다리를 잡았다. 김식이 몸을 틀어 나를 내려다 보았다.
“그날 왜 나랑 잤어?”
“너가 자자고 했잖아.”
미간을 세운 김식이 내 꼬락서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니깐. 너 아무나 자자고 하면 자는 거 아니잖아.”
“…붕대 때문에?”
나는 이상했다. 나는 지나치게 풀어졌다. 김식의 허벅지를 잡고 있던 손이 살금살금 위로 올라갔다. 내 손이 김식의 바지 허리에 닿았다.
김식도 이상했다. 가슴에 팔짱을 두르고 낯선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가 난 것도 같았다.
“식아.”
나는 김식의 바지허리를 천천히 풀었다.
“왜? ”
“해줄게.”
“나야 좋지만….”
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알싸한 취기가 내 뇌를 먹었나보다.
“자장면 대신이야.”
버클이 풀리고 지퍼를 내렸다.
꼴깍. 김식의 침 삼키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려왔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 주정뱅이야.”
까르르르. 나는 또 웃었다. 주정뱅이란 그 단어가 웃겼다.
팬티 안에 이미 존재감을 드러내는 성기가 보였다. 손으로 툭하고 팬티 위를 쳤다. 조금 누그러진 김식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식아. ”
나는 김식의 성기를 보며 그렇게 불렀다.
그곳에 진짜 김식이 있는 것처럼 또 까르르 웃으면서 속옷에 쌓인 제 혼자서 꿈틀 움직이는 성기를 보며 그렇게 불렀다.
“식아.”
손으로 속옷을 잡아당겼다.
한껏 눌려있던 성기가 용수철 튀어나오듯 툭하고 튀어나왔다.
“안녕.”
난 성기를 향해 인사를 했다. 그리고 덥썩 그것을 입에 넣었다. 가게에서 맛본 모든 음식의 맛이 아직 입안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처음 느낀 맛은 말캉한 젤리 맛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를 세워 물고 싶은 말캉함과 단단함이 공존하는 이상한 맛이었다.
그 상태로 눈을 들어 김식을 쳐다보았다.
욕망이 물든 눈으로 김식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 해?
살짝 혀로 성기 끝에 대었다. 갈라진 틈새가 혀끝에서 느껴졌다. 순간 김식이 질끈 눈을 감았다. 미끈거리는 액체의 이상한 맛이 혀 끝에 느껴졌다. 이상한 맛이었다. 다시 살짝 혀를 내밀었다. 김식의 허리가 잘게 튀었다. 나는 김식의 성기를 입에 문채 다시 까르르 웃었다
어느 더운 여름 날 김식이 그렇게 말했다. 아이스바를 먹는 나를 보면서 했던 말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나는 머리가 좋았고 배움은 빨랐다. 아이스바를 먹듯이 성기를 핥았다. 그럴 때마다 즉각적으로 허리가 잘게 튀며 즉각적인 반응이 나왔다.
“주정뱅이도 괜찮네.”
김식이 나를 밀어냈다. 따뜻하고 단단한 장난감을 뺏긴 나는 다시 덤비려했다. 그러나 김식이 조금 더 빨랐다. 나를 삼켜버릴 듯 거세게 입을 맞춰왔다. 방금까지 내 입안에 뭐가 있었는지 알면서 거침없이 나를 먹어 치웠다.
언젠가 벽을 바라보고 있을 때처럼 나는 모로 누웠다. 통창 밖에 뜬 달이 눈 안에 훤하게 들어왔다. 내 뒤쪽에서 김식이 내 다리 한쪽을 들고는 거세게 삽입을 해왔다. 어둠이 깔린 통창에 김식에게 먹히는 내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김식의 허리를 튕길 때마다 통창에 비친 나는 야하게 반응했다. 흔들릴 때마다 밤하늘의 달도 같이 흔들렸다.
“그때 너 부서질 것 같았거든.”
잔뜩 쉰 목소리로 김식이 말했다. 드러난 내 어깨에 이빨을 거세게 박았다. 나는 아픔과 쾌락에 긴 신음을 내뱉었다.
“씨바. 두고 어떻게 가냐고. ”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김식이 한숨처럼 말했다. 어느 순간 나는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깊고 푸른 밤이었다.
D-1
몸이 출렁거렸다.
알콜에 절은 머리는 자꾸만 뒤로 넘어갔다. 하루 종일 나는 숙취 때문에 끙끙거렸다. 그런 나를 보며 김식이 쿡쿡 거리며 웃었다. 그런 김식에게 베개를 또 던졌다.
저녁때 가족과 식사를 한다고 나갔던 김식이 까스스하게 머리를 밀고 나타났다.
김식과 처음 잤던 그 밤에 손바닥에 남아있던 그 감촉이 생각나 나는 자꾸 김식의 머리를 만졌다. 손바닥 안에 김식을 남겼다.
D- 0
이른 새벽 김식이 집을 떠났다. 내 이마에 길게 입맞춤을 하고 이 집안에 있는 것은 모두 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더 자. 라고 하고는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고 나는 숙취에도 잠에서도 완전히 깨어나 버렸다.
“심심해.”
허공에 대고 문득 그렇게 말했다.
고작 일분 밖에 안 지났는데….
미움밖에 없던 내 인생에 심심함이 찾아왔다.
푱이가
꼬랑쥐-
제가 살고 있는 이 집과 이사오기전의 먼저 집에서는
거실에 누워있으면 밤하늘의 달이 보입니다.
심봤다군과 어렸을적부터 달이 보이는게 너무 좋아서
달을 볼때마다 이것을 꼭 기억해두자고 했답니다.
그래서 김식의 집에도 달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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