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제목 : 설빙화
지은이 : 한수영
출판사 : 러비더비
발행일 : 2004년 7월19일
정 가 : 2,500 원
나는 대한인입니다.
당신은 일본인입니다.
나는 당신이 아는 중국의 월극인이 아닌 독립군입니다.
당신은 내게 있어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 일본인 장교입니다.
나는 말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이 죽는다해도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작품소개]
설빙화라 불리는 상해의 유명한 월극인 은류의 정체를 모른체
일본의 빙도라 불리는 조각의 미모를 가진 남자 류는 은류의 입술을 빼앗고...
[맛보기]
“화장을 안 한 모습이 더 예쁘군. 무대에서의 당신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비현실적으로 보였소. 하지만 여기 실재하는군."
류의 손가락은 이제 제멋대로 은류의 얼굴을 쓸고 다녔다. 보라색이 도는 잘 영근 포도알 같은 검은 눈동자가 자리한 얄팍한 눈 주위를 어루만졌다가 연이은 공연의 피로로 인해 생긴 눈 밀의 그늘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피부로 덮인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다가 고집스럽게 다물고 있는 입술에서 닿았다. 난초 꽃잎의 부드러움도 조그맣고 도톰한 피부에는 비길 수가 없었다. 그가 손을 멈춘 동시에 은류는 들고 있던 비녀의 날카로운 끝을 단단한 어깨에 박았다.
팍, 살 찢기는 소리가 예민하게 들렸다.
“그건 당신 말대로 무대 위의 환상일 뿐이죠. 장교 나리."
금세 비녀가 박힌 끝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번졌다. 조그만 점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황색 군복의 어깨 부분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사소한 아픔정도에는 통달해 버린 사람처럼 류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어깨에 박힌 비녀를 빼냈다. 그리고는 떨림 없는 손으로 그것을 화장대 위에 놓았다.
“중국인의 자존심인가? 당신네 중국인들은 유난히 자존심이 강하더군. 그래서 왕소군도 청총(?塚)을 남겼다고 노래했나? 절개를 지켜서 죽은 후에도 무덤이 사철 푸르렀다니…. 내가 알기론 왕소군은 흉노의 선우(?于)에게 시집가 아들을 낳았고 그가 죽은 뒤엔 그의 아들인 다음 대 선우의 아내가 되어 딸을 둘 낳았지. 이렇게 처연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당신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소? 주은류양."
“남의 나라 삼키는 건 예사로 아는 당신네들이 절개가 무엇인지 알기나 하겠어요?"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겠지만 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은류의 두 손을 등뒤로 돌려 한 손으로 제압하고 턱을 잡았던 손을 가까이 끌어 당겨 연한 입술을 빼앗았다.
원수의 입술이다!
- 본문 내용 중에서 -